픽션-Part 1.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
아, 커피의 맛은 얼마나 기가 막힌 지,
천 번의 키스보다 더 사랑스러우며 포도주보다도 달콤하다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커피 칸타타」 중에서 -
모닝커피, 왜 주스가 아니고 녹즙이 아니고 홍차가 아닌 커피란 말인가. 커피의 강한 각성효과 때문이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에게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효과라고 본다면.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카페 안의 노란 조명 밑에서 주문 벨을 앞에 두고 기다린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서 인지 저 구석에 홀로 앉은 젋은 여자 빼고는 테이크아웃 손님들만 오간다. 커피하우스가 막 생겨난 무렵의 유럽에서 그곳은 정치와 학문 토론의 장으로서 전제군주정 아래 불온한 사상가들의 소굴이었지만 지금 이 나라 이곳에서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욕구 해소와 일과 가정의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난 대안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주택가 까지 파고든 커피 전문점은 일상이 되었고 기억 속에 수많은 테이블 위의 대화들이 겹쳐져 오늘의 데자뷰를 일으킨다.
“너무 마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뇨, 커피는 건강에 좋죠.”
“전 잠자기 전에 커피마시는 걸 즐기죠. 자기 전에 많이 마시면 꿈꾸는 속도가 빨라져요.”
낯선 듯 어딘가 익숙한 이 장면은 짐 자무쉬 감독의 흑백 영화 「커피와 담배」 속, 테이블 앞에 앉은 사람들의 모습들이다. 대화 중에 그들은 연신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핀다. 어째서 커피 와 담배인걸까. 둘 다 중추신경계를 자극하는 물질이 들어 있고 기호품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그런 것들을 필수적인 것이 아님에도 자꾸 소비하게 되고 중독이라는 단어가 뒤따른다.
카페인 중독, 니코틴 중독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일상적인 감각의 기호품 중독이라는 표현에도 중독이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인 인상은 연상작용의 마지막에는 마약을 연상시키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마약역시 생활에 필수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지만 인류는 농경을 시작하면서 부터 마약의 원료가 되는 식물을 재배해왔다고 한다. 인류와 마약 사이의 역사는 생각보다 가깝고 오래되었다. 심지어는 마약원숭이 가설이라는 것도 있을 정도다. 이 가설은 고대 인류가 실로시빈이라는 환각물질이 포함된 버섯을 섭취하면서 지능이 급속도로 발전했다는 미국의 민속 식물학자인 테렌스 멕케나의 주장이다.
마약이 불법이 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고대인들은 종교적 제의를 위해 마약을 사용했고 중세 기독교는 마약을 금했지만 이슬람은 술을 금지했기 때문에 마약을 금하지 않았고 마약이 십자군전쟁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어 약초상과 치료사 등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들은 전쟁과 페스트 등으로 인구가 줄어 경제활동이 늘아난 특별한 기술이 없던 여성들이었기에 이는 마녀사냥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금지는 르네상스에 접어들면서 풀렸고 다시 일상적으로 소비된다. 19세기 과학이 발달하면서 합성마약이 만들어져 의약품으로 쓰인다. 코카인, 필로폰과 헤로인은 이 시기 치료용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런 약들 중에 윈슬로우 부인의 진정 시럽이라는 것이 있었다. 모르핀으로 만들어진 이 약은 유아들을 대상으로 쓰였는데 당시 가난한 하류층 노동자들은 하루종일 일하는 동안 식비도 줄일 겸 아이를 재우기 위해 썼다. 성분이 성분이니만큼 아이들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낙후된 환경 탓에 이미 영아 사망률이 높아서 마약의 위험성에 무지했던 당대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산업혁명기 기본권도 없이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던 노동자들이 자식에게까지 마약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묘하다. 과연 사람들이 마약에 중독되는 것은 자의적이나 타의적이나. 심리학자 브루스 알렉산더의 쥐 공원 실험이 생각난다. 쥐들을 한 무리는 비좁고 삭막한 우리에, 다른 무리는 쾌적한 쥐 공원에 풀어 좋고 양쪽 모두 모르핀을 탄 단물과 보통 물을 넣어주었다. 그러자 시간이 흐를수록 후자인 쥐 공원의 쥐들은 보통 물만을 마셨지만 전자의 쥐들은 16배나 많이 모르핀이 든 물을 마시며 중독되어갔다. 알렉산더는 이 결과를 두고 사회적 억압이 중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해석했다. 인간과 쥐 사이에 차이를 더 생각해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 입구의 종이 울리고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들어온다.
남자는 왼쪽 기둥 옆 구석에 혼자 앉아있던 여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간다. 여자가 고개를 들고 이어폰을 빼고 남자가 의자에 앉는다.
“벌써 시켰어?”
“아이스 카라멜 마키아또, 맞지?”
여자와 남자는 대화를 나눈다. 여자의 발끝이 남자 쪽을 향하고 상체는 앞으로 기울어진다.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여자가 앞머리를 넘기더니 손목 안쪽을 바깥쪽으로 내놓고 귀뒷머리를 매만진다. 돌아서 있어 여자의 얼굴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의자에 기대 뒤로 몸을 기울이고 팔짱을 끼고 있다.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일까. 대화란 단순히 음성신호가 공기를 타고 오가는 현상만을 뜻하지 않는다. 수많은 콘텍스트들이 상호작용하는 흐름이다. 그 안에서 엎어질 듯 말듯 뒤뚱거리는 보이지 않는 긴장의 축을 어제도 오늘도 발견하게 된다. 지금처럼 즉흥연기의 무대가 오르고 나면.
일상의 순간을 무대로 하는 배우들의 보이지 않는 힘의 줄다리기, 관습의 틀 안에서 무의식과 의식 사이 넘실대는 대사의 파도가 철썩거리는 모습은 어딘지 토막 난 부조리극의 냄새가 난다. 외젠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는 대표적인 부조리극 중 하나이다. 영국의 중산층 가정의 실내에서 집주인 스미스 부부와 손님인 마틴 부부, 하녀 메리와 소방대장이 등장하는 단막극의 시작은 얼핏 평범한 일상의 대화 같으나 앞뒤가 안 맞는 헛소리들로 이어진다. 시간이 갈수록 대화가 아닌 대사는 의미가 전혀 닿지 않는 동시적인 지껄임으로 해체된다. 이처럼 평범한 상황 속에 대화들이 돌연 낯설게 혼란을 던짐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될까. 생각보다 현실은 의식의 합리적 질서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걸 부조리극의 낯설게 하기로서 이야기 하는바는 작지 않다.
「대머리 여가수」 속에는 대머리 여가수가 등장하지 않는다. 제목에 이름을 올리고도 주인공은커녕 등장하지도 않고 대사로 잠시 언급되는 것이 다이다. 이상하게 사기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든 달까. 얼마 전에 다녀온 「피카소와 큐비즘」 이라는 전시도 생각난다. 피카소가 큐비즘의 시작을 알린 그림의 작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작품은 전시 되지 않았고 실제 전시된 피카소의 작품은 중요도가 낮은 세 작품 정도가 다였다. 그럼에도 그냥 큐비즘 전시라고 하지 않고 피카소의 이름을 앞에 붙여 강조한 건 거장의 국내 인지도에 대한 후광을 얻고자 한 의도가 없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런 후광효과는 마케팅에도 많이 쓰인다. 1995년도 국내로 수입 개봉된 영화인 「시고니 위버의 진실」도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죽음과 소녀」 라는 원제를 두고 작품 속 이름도 아닌 배우의 본명을 앞머리에 떡하니 붙인 작명 감각이라니. 그만큼 제목이 중요하기는 하다. 이 순간을 흐르는 이 이야기에 제목을 붙인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지잉지잉, 진동 벨에 불이 들어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간다. 새하얀 머그잔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갈색액체가 가득이다. 그걸 트레이에 받쳐 들고 조심조심 자리로 돌아간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 모금 들이마신다. 따뜻한 향기와 맛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우리 이 커피를 샴페인으로 생각하지”
“왜 그래야만 하나?”
“그냥 삶을 축하하기 위해서. 부유하고 우아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신분이 높은 사람들 말이야.”
“난 커피가 더 좋아. 노동자들의 커피”
“자넨 너무 소박해, 빌, 자네의 문제가 뭔지 아나?”
“뭔데?”
“삶의 기쁨이 없다는 거야”
자무쉬의 흑백화면 속 두 노인이 쉬는 시간을 틈타 커피로 휴식을 시도한다. 휴일의 오늘, 커피 전문점은 일상이 되었지만 일상으로부터 쉬기 위해 선택한 일상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앉았던 기억들이 켜켜이 쌓이며 단편영화나 단막극처럼 상영될 것이다. 커피, 왜 주스가 아니고 녹즙이 아니고 홍차가 아닌 커피란 말인가. 카페, 커피. 한 모금 더 홀짝이며 방백.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