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Part 1.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
가뿐하게 땀 흘리는 아침의 산책길 가운데 나의 인생이 있다네.
- 휴고 볼프의 가곡 「산책」 중에서 -
왼발, 오른발, 한 발작, 두 발작. 어느새 경쾌한 리듬을 타고 앞으로 나아간다. 오전의 어수선한 공기를 가르며 길 위를 걷는다. 주변의 풍경은 뒤로 스쳐가며 홀로 나를 둘러싼 세상 앞에 몸을 내미는 동안 내 자신이 한없이 내쳐지고 있는 존재라고 느끼고 마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다. 모든 행동이 본질의 표면에서 미끄러지고 언제나 핵심을 꿰뚫지 못함 또한 내가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탓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나는 사람이기에 어딘가로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요즘의 시대에 맞게 인터넷을 통한 상시적이고 시공의 제약이 완화된 연결 방식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그 안에서 피로감을 느꼈다. 차별화와 동일시를 오가는 정체성 형성에 대한 욕망과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다면화된 자아의 정립 방식 같은 복잡한 양상을 헤아리자면 머리가 아파온다. 이런 추상적인 표현에 매몰되어 버리면 현실에 대한 피부로 와 닿는 접근이 어려워지겠지. 그냥 걷는 수밖에.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을 보니 빨간 불이다. 보도 끝에 멈춰서 고개를 돌리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나와 같이 신호를 기다리며 서있다. 그리고 하나 같이 손에 직사각형의 넓적한 물체를 쥐고 들여다보고 있다. 모두 여기 있지만 동시에 여기 있지 않다. 문득 오래전 읽은 인터넷 소설이 생각난다. 초등학생이 장난으로 빨간불에 앞으로 나갈 듯이 한 발작을 내딛었더니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있던 젊은 여자가 그대로 걸어 나가 차에 치여 버렸다는 이야기. 이것도 일종의 괴담인가. 지금 내가 그렇게 하면 몇 명이나 걸려들까. 이런 시답잖은 생각이 이어진다. 만약 사람들에게 모든 디지털 디바이스를 빼앗고 아무것도 없는 휜 방에 가둬둔다면 어떻게 될까?
금단 현상에 시달릴까, 아니면 평온해질까? 굳이 그런 극단적인 설정이 아니라도 현실에서 수인이 되는 경우는 있겠지. 그래도 인터넷도 없고 징벌의 의도로 독방에 갇힌다면 괴로워 할 수도 있겠다. 외부로 뻗는 감각이 차단당한 채 ‘나’라는 존재가 휴지가 물에 풀어져 흩어지듯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사람은 거울을 보지 못하면 스스로를 볼 수 없듯 타인이 없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울 것인데.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는 “만일 그대가 자신을 알길 원한다면 남들의 행동을 주시하라. 만일 그대가 남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라.”라 했다.
그렇다면 혼자가 아닌 두 명의 수인들이라면 어떨까. 이러니까 소설이 한 권 생각난다.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 발렌틴과 동성애자 몰리나가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세상과 단절된 감방 안에서 몰리나는 매일 자신이 보았던 영화이야기로 자신과 발렌틴 사이의 벽을 서서히 허물고 마침내는 동성애적 관계를 맺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동성애라는 측면 말고도 인간 대 인간으로서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게 되는 타인과 연결 되고자하는 욕망을 찾을 수 있다. 혹독한 환경과 모진 고문을 겪는 발렌틴에게 함께였다는 기억,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은 몰리나의 부재와 죽음 이후에도 삶을 버티게 해주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을 이어주는 그 사이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인류의 소통 방식에서 이야기를 빠트릴 수는 없다. 스토리텔링 마케팅이라는 게 있는데서 알 수 있듯 사람들은 같은 것이라도 이야기가 있는 쪽을 더 잘 기억하고 흥미로워한다. 그리고........신호등이 바뀐다.
걸음을 빨리해서 건너편 블록에 도착한다. 가로수들이 아직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가지를 하늘로 뻗고 줄줄이 이어진다. 겨울이 가시지 않은 오늘 같은 날 밤에는 왠지 난롯가에 둘러앉은 식구들의 정경이 어울린다. 동굴 속에 살던 원시인들도 어둠이 깔리면 불 주위에 둘러앉아서 낮에 사냥감을 잡은 모험담 같은 걸 이야기 했을 것 이다. 세헤라자데가 천일 밤 동안 목숨의 부지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는 장면도 떠오른다. 길을 저 앞까지 쭉 걸어서 모퉁이를 돌면 세헤라자데의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보관된 구립 건물이 나온다.
도서관 입구에는 주말을 맞아 공부하러 온 듯한 백팩 맨 앳된 얼굴 한 무리가 보인다. 한때 나도 저런 무리 중 하나였다는 기억은 아득하다. 과거의 시간 속을 뚫고 현재로 걸어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저 아이들의 오늘 같은 날을 지났는지. 입구로 들어가려니 아이들 가운데를 가로지르게 된다.
“그래서 황금폰이라고 한거야?”
“걔도 웃긴다. 다 알면서 말 안한 거네.”
여자아이 둘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요즘 시끄러운 연예인의 범죄 얘기인 모양이다. 이것도 이야기니까, 그것도 유명한 사람들의 자극적인 범죄 이야기이니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반응하게 되는 것이겠군. 막장 드라마가 욕을 먹으면서도 명맥을 이어가는바와 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도 같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명작, 고전으로 인정받는 작품 중에 이야기의 뼈만 발라내면 막장에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책에서 비극을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은 가상의 머리기사를 썼다. 오셀로- “사랑에 눈이 먼 이민자 원로원의원의 딸을 죽이다”, 마담 보바리- “쇼핑 중독의 간통녀 신용사기 후 비소를 삼키다”, 오이디푸스 왕- “어머니와 동침으로 눈이 멀다”. 가장 진지해야만 할 것 같은 비극이 이럴 수 있다는 건 무얼 보여주는가. 막장 드라마 속 주인공들만은 나름대로 심각하고 격한 정서 상태임에도 이야기를 바깥에서 보는 이에게는 우스꽝스러움으로 비웃음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보면 오묘한 기분이 든다. 비웃음이 아닌 눈물을 자아내는 게 비극과 막장에 차이를 만들어줄까?
이상한 것은 비극을 본다고 눈물이 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거다. 장르 불문하고 잘 짜인 비극 작품을 보고 나면 어떤 감정의 움직임을 느끼지만 그것이 단순한 슬픔이라기보다 긴장과 이완의 급격한 낙차에서 오는 느낌이랄까 하나의 상태가 아닌 변화자체의 감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을 설명한 데로라면 이것을 감정의 정화작용, 즉 카타르시스라고 했을 것이다. 막장 같은 사건에서 인물을 단순히 비웃거나 비난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닌 동일시할 수 있을 때 감정의 이입이 있고 이야기의 끝과 함께 현실로 떨어져 나오는 낙차가 변화를 이끄는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눈물을 짜낸다고 끝은 아닐 것이다. 작품과 마음의 거리감을 되찾았을 때 혐오하면서도 그 마음의 작용 방식을 이해하고 마는 복합적인 감상이 더 찐득하게 달라붙지 않나. 아닌가? 하도 배운지 오래되어서 이런 설명이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텅, 도서관 입구의 무인 반납기 속으로 책이 떨어지며 모자란 머리로 짜낸 설명들이 떨어져 내린다.
도서관을 빠져나와 한 번 더 모퉁이를 감아 돌아 인도를 따라가면 공원이 나온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훑는다.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한편에 세워진 운동기구 들을 차지하고 있다. 발걸음을 늦춰 본다. 이어진다는 것은 좋은 것일까? 끝나지 않는 연속은 쉴 틈을 허용하지 않을 텐데. 사람이 이어지는 방식은 연속적인가 분절적인가. 카톡이 왔을 때 직접 얼굴을 볼 때처럼 ‘안녕, 잘 가.’라는 말이 없는 전날의 대화들을 순서대로 훑어보면 이 대화는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몇 시간, 며칠 전 질문에 오늘 대답하면서도 이야기는 이어지니까 말이다. 메시지를 읽었는지 여부를 알 수 있게 되면서 침묵조차도 행간의 메시지가 된 것 같다. 저기서 운동하는 동안에도 메신저로 메시지가 오고 있다면 진짜 오프라인 상태인 사람은 없는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모두 연결 돼있다는 사실은 모바일 메신저가 활성화되기 전에도 알려져 있었다. 1998년 미국의 물리학자인 던컨 와츠는 ‘작은 세계 이론’을 발표하면서 미국의 영화 산업을 사례로 제시했다. 케빈 베이컨이라는 배우와 같은 영화에 출연한 사람과 다시 그 사람과 다른 영화를 찍은 사람을 연결하고 그 사람과 다른 영화를 같이 찍은 사람을 연결하는 식으로 반복하면 22만명이 넘는 배우와 연줄이 닿는다. 케빈 베이컨 법칙은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은 최대 6단계 이내에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과도 모두 연결된다는 이론이다. 나와 트럼프, 폴 매카트니나 에르도안이 여섯 단계 안에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확실히 묘하긴 하다.
그러고 보니 이야기도 연결 작용을 한다. 아침의 산책길에서 이어지는 연상작용은 두서없긴 하지만 이야기가 된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 어릴 적의 동요를 흥얼거려본다. 그때의 동요와 지금의 말들이 별반 다르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시간들이 이어지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를 바랐다. 오전의 공원 산책로를 헤매는 동안에도.
맑은 금속 종소리가 등 뒤로 울린다. 자전거 한 대가 우두커니 선 내 옆을 지나친다. 나는 발을 떼고 왼발, 오른발, 한 발작, 두 발작, 어느새 경쾌한 리듬을 타고 앞으로 나아간다. 오전의 어수선한 공기를 가르며 길 위를 걷는다. 주변의 풍경은 뒤로 스쳐가며 내가 홀로 나를 둘러싼 세상 앞에 몸을 내미는 동안 내 자신이 한없이 내쳐지고 있는 존재라고 느끼고 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