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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Jun 07. 2021

100을 셀 때까지

짧은 이메일들

유지니아에게


어제 꿈을 꿨어. 눈을 감고 100까지 세는데 자꾸 귓가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하지만 눈을 뜰 수는 없었어. 왜인지 너무 무서웠어.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너무 낯설고 오싹하게 느껴졌어. 그런데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을 감고 선채 쩔쩔매는데 감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섞여 들었어. 네 목소리가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눈을 뜨고 말았지. 그리고 그 순간 끝도 없이 추락하고 말았어.


유지니아, 너에게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은지 벌써 석 달 째야.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소식이 끊기기 바로 전까지 너는 나에게 기대할만한 일이 있다고 알려주고 지금은 비밀이지만 곧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그건 뭐였어? 기대할 만한 일이니까 분명 좋은 일인 텐데 왜 자꾸 나는 나쁜 일을 의심하게 될까? 어디가 아픈가? 사고라도 일어났나? 내가 너무 진지하게 굴어서 기분 상했나? 별 생각이 다 들어. 그냥 잘 지낸다고 말해줘. 그게 어려울 만큼의 사정이 있는 거야?


나는 이전과 다름없어. 아침에 일어나고,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네 이 메일을 기다리고, 웹서핑을 하다 잠들어. 밥을 먹을 때마다 스마트 폰을 들고 메일함의 수신확인을 체크해. 그리고 자려고 눈을 감으면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의구심에 사로잡히지. 혹시 너와의 추억들이 전부 나의 망상이고 심지어는 너라는 존재조차 나의 환상이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에. 그 여름 네가 갑자기 숨바꼭질을 제안한 기억이 특히 생생해.


느닷없이 박물관 중앙 홀에서 내 뒤로 다가와 눈을 가리며 말했잖아. 우리 숨바꼭질하자. 그리고는 네게 100가지 세라고 말하고 가 버렸어. 나는 또 바보 같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지. 하지만 100까지 가기도 전에 나는 뒤를 돌아봤어. 넌 벌써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어. 당황한 나는 드넓은 국립 박물관을 헤매기 시작했지. 신석기 유물 옆에도 서화관에도 10층 석탑 뒤에도 너는 없었어. 나는 갑자기 미아가 되어버린 기분에 사로잡혔어. 그 기분에 휩싸여 기운을 잃은 채 복도의 장의자에 앉아 있는데 내 옆으로 불쑥 손이 쑥 나오더니 작은 물건을 흔들었어. 나는 위를 올려다보고 놀랐지. 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기념품 상점에서 산 열쇠고리를 흔들고 있었어.


그때의 안도감이라니. 유지니아, 너는 정말이지....... 그러고 보니 혹시 기대하라던 깜짝 이벤트가 바로 이거니? 일부러 소식을 끊고 있다가 뿅 하고 내 앞에 나타 날려고? 제발 그런 것이길 바라.


민호에게


유지니아는 떠났어. 우리는 그녀의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알 길이 없구나. 죽음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믿기에 나는 그다지 신실하지 못하단다. 그간 너희가 주고받은 내용을 살펴보았어. 너에게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다면 미안하구나. 하지만 우리에게 그녀가 남긴 자취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하고 희소하니까 모두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누를 수 없었어. 나는 너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유지니아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그 애는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 항상 네 이름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어- 이렇게 네가 쓴 글들을 보니 네 모습이 생생하게 닿아왔어.


얼마 전까지도 그 애는 너를 놀라게 해줄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어. 여기저기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하고 출국 준비로 바쁘게 돌아다녔지. 네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어 주겠다고 네게 받은 사진들을 고르고 한국의 전시장소를 지인들을 통해 알아보았어. 네 꿈을 이루어 주고 싶다고. 우리도 네 사진을 보았단다. 유지니아가 과장한 게 아니었어. 너의 사진들에는 정말 무언가가 있었어. 특히 유지니아를 찍은 그 사진, 조그만 칵테일 장식 우산을 들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뛰어오르는 옆모습은 특별했어. 피사체가 우리가 사랑하는 이여서 그런 게 아니야.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유지니아는 들떠 있었어. 멋지게 나타나서 너에게 최고의 생일을 선사할 거라고 다짐했지. 그런데 출국을 앞둔 전날 , 우리가 결코 예상할  없었던 사건이 그녀에게 일어나고 말았어. 유지니아는 너에게 선물할 골동품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직거래로 받아오는 길이었어. 너희가 비비안 마이어 카메라라라고 부르던 바로  모델 말이야. 그래, 너희는 비비안 마이어를 좋아했지. 그래서 유지니아는   모델을, 비비안이 가졌던 것과 비슷한 시대가 켜켜이 쌓인 골동품을 선물하고 싶어 했어. 그래서 먼저 거래하기로  카메라 주인이 마음을 바꾸자 서둘러 새로운 카메라를 찾았고 출국 전날에야 다른 지방으로 가서 카메라를 가져오게  거야. 유지니아는 거래를 끝내고 서둘러 돌아오기 위해 고속도로를 타기로 했어. 그리고  그녀의  앞으로 파이프를 가득 싣고 공사 현장으로 가는 트럭이 주행하고 있었지.  트럭의 고정되지 않은  스프링이 빠지면서 바닥에 튕긴  유지니아의  앞으로 날아들었어. 그리고  쇠막대는   앞유리를 뚫고 그녀의 머리에 정통으로 날아들고 말았단다.


우리는 그녀를 영원히 잃고 말았구나. 여기까지 쓰는데도  번을 멈추고 숨을 고르었는지 몰라. 우리는 지난주에 그녀를 가족 납골당에 안치했단다.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고 컴퓨터를 살펴보면서 너희의 이메일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글을 타이핑하고 있는 책상 위에 그녀가 남긴 롤라이플렉스가 있어. 이걸 어떻게 할까 한참을 고민했단다.  것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그날  도로에 바로   뒤에 있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꼴도 보기 싫다가도, 그녀가 그처럼 기대하고 바라던  때문에  선물이라느데 생각이 미치니 소중하게 여겨지더라. 그래서 우리는  카메라를 원래대로 너에게 주기로 했단다. 너를 직접 만나 전해주고 싶어.  생각은 어떻니? 너만 괜찮다면 우리는   안에 한국으로 날아갈 생각이란다. 마음 추슬러지는 데로 답장 주렴. 정말 유감이구나. 너도 슬프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있는 일을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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