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씨앗을 냉장고에 넣어두는 진짜 이유

by 농부아내


춘분 즈음부터 텃밭에 파종을 시작하게 된다. 파종하기 위해 원예사나 재래시장에서 구입한 씨앗 봉투 안에는 대체로 필요한 양보다 항상 많다. 보관만 잘하면 한번 구입해 2~3년은 거뜬하게 사용할 수 있다. 씨앗은 용기나 봉투에 담아 밀봉한 뒤 온도와 습도가 낮은 곳에 보관하면 된다. 가정에서는 냉장고에 보관하면 2~3년은 싹을 만날 수 있다.


<씨앗보관방법>

- 용기나 봉투에 담아 밀봉
- 냉장고 보관




내 보물이자 귀농생활을 견디게 해 준 몇 안되는 것 중 하나가 텃밭이다. 누구를 만나든 귀농했다고 하면 어김없이 같은 질문이 돌아온다.


"어떠세요?"


짧은 질문 안에는 여러 뜻이 섞여 있다. 불편하진 않느냐, 후회하진 않느냐, 도시가 그립진 않느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저는 엄청 만족해요~ 텃밭 가꾸고, 마당냥이들이랑 놀고… 그게 제일 좋아요."


나의 표현이 부족하더라도 마주 앉은 사람은 내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보여요~"

그런 만족감은 숨길 수가 없다.


귀농생활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텃밭을 제대로 시작한 것은 마을 끝집할머니 덕분이었다. 텃밭을 해보겠다고 땅을 갈고 두둑을 만들고 있으니 할머니가 유모차(보행보조기)를 끌고 오셨다.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셨다. 고무줄로 돌돌 말린 작은 씨앗 봉투였다.


“이거 심어봐. 무우 씨다”


손때가 묻은 봉투는 조금 바랬고, 접힌 자국마다 세월이 느껴졌다. 고무줄을 풀어보니 3년도 더 된 씨앗이었다. 나는 속으로 놀랐다. 씨앗이 그렇게 오래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사실 그때 나는 식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모종을 사다 심어도 물 주는 타이밍을 놓쳤고, 잡초와 작물을 구분하지 못해 뽑아버린 적도 있다. 그 해 무는 몇 뿌리 나오지 않았다. 통통하게 여문 건 손에 꼽혔고, 솎음을 하지 않아 대부분은 가늘고 여린 상태였다. 그래도 그 몇 개의 무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남은 씨앗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할머니가 주셨던 그대로, 다시 고무줄로 돌돌 말아 찬장 한쪽에 넣어두었다. 그 다음 해부터 씨앗 봉투가 하나둘 늘어났다. 남편이 어디서 얻어왔다며 건네준 것도 있었고, 장날에 충동적으로 집어온 것도 있었다. 작은 봉투 속에는 내가 아직 모르는 계절이 들어 있었다. 상추, 열무, 비트, 쑥갓…. 이름만 들어도 맛있겠다.


씨앗이 늘어나니 고민이 시작됐다. 매번 새로 사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아무 데나 두자니 내년에는 싹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검색을 해보고서야 알았다. 밀봉해서 냉장보관하면 2~3년은 충분하다는 걸. 그날 이후 우리 집 냉장고 신선칸 한쪽은 씨앗 전용이 되었다. 아이들 먹는 배즙 옆에 씨앗 통이 나란히 놓였다.


다른 텃밭지기님의 텃밭에서 본 작물을 나도 키워보고 싶었다. 식당에서 맛있게 먹은 채소는 직접 키워보고 싶었다. 내 욕심에 따라 씨앗봉투도 늘기 시작했고, 텃밭 사이즈도 넓어졌다. 그렇게 씨앗은 점점 다양해졌다. 씨앗통을 열어보면 작은 봉투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봉투마다 적힌 파종 시기와 재배력. 그 숫자들은 내 계절표가 되었다.


이제 나는 남은 씨앗을 함부로 두지 않는다. 씨앗보관함을 따로 구입할 만큼 열정적이진 않지만, 적어도 밀봉하고 냉장고에 넣는다. 이것은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의 기억을 예약해두는 일이다. 냉장고 한 칸에 들어 있는 씨앗 봉투 안에는 씨앗만 있는 게 아니다. 실패했던 해의 기억, 처음 싹을 보고 소리 질렀던 아침, 아이들과 함께 수확하며 나눈 웃음까지 함께 들어 있다.


씨앗을 보관한다는 건 그동안의 기억을 보관하는 일인 것 같다. 다음 춘분이 오면 또 봉투를 꺼내 밀봉해 놓은 테이프를 뜯을 것이다. 계획을 세우고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기다림을 또다시 배우게 될 것이다. 기다림 끝에 만난 싹을 보고 힐링을 느끼며 다음 계절의 기억을 기다릴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씨감자 싹 틔우기, 우리 집 공부방에 먼저 온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