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초보농부아내 시점
물론 아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지자체나 국가에서 진행하는 귀농인을 위한 다양한 정책과 지원사업들이 있고, 조건에 부합해야만 신청을 통해 지원을 받을 수 있다. 2019년, 초보농부님이 기다린 것은 100% 지원의 비닐하우스 시공사업이었다.
귀농 2년차까지는 매년 비닐하우스를 임대해서 밤호박 농사를 지었다. 두 번째 임대계약이 끝나갈 때쯤 50% 지원사업이 공지되었고 100%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초보농부님이 지원한 사업은 신청 당시 전입일로부터 1년 이상 3년 이내 거주 귀농인 대상의 "귀농인 정착 지원사업"으로 농업생산 기반구축 관련 보조비 지원이었다. 모든 조건들이 우리를 향해 있었고, 비닐하우스 시공이 시급했던 우리에게는 적절한 지원사업이었다. 사업이 공지되고 초보농부님은 서류 준비에 돌입했다.
농부는 서류작성도 잘해야 돼~!
국가주관이든 지자체 주관이든 사업비를 지원받으려면 많은 양의 서류 작업이 필요하다. 귀농 초반, 귀농인을 위한 혜택과 사업비 지원을 받기 위해 신청서류 작성은 초보농부님 몫이었다. 당시에 초보농부아내는 아이들 케어, 해남살이와 농사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간단하게 종이 한 장에 이름 쓰고, 동의하고 사인하면 그동안 우리가 받은 혜택들(집수리비, 집들이 비용 등)을 누릴 수 있는 줄 알았다. 몇 번의 서류 작성과 퇴짜들(최종 신청이 되기 전 귀농귀촌센터나 농업기술센터 담당 선생님들께서 도움을 주시며 다시 작성할 부분들을 알려 주신다)을 겪으며 서류작성의 스킬을 쌓아가고 있었다.
아내 : 비닐하우스 지원사업이 몇 % 보조였어요?
농부 : 50%~! 서류파일이 있어~
글을 쓰기 위해 자료조사차 물어보고 서류파일을 메일로 건네받았다. 무려 27쪽짜리 한글파일이었다. 5쪽 정도는 사업에 관한 설명과 필요서류, 신청유의사항 등이었다. 나머지 22쪽 정도는 작성해야 할 서류였다. 내용을 살펴보니 22쪽 외에 사업이 끝난 뒤 증빙서류도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다. 빈칸을 메우는 것만이 아니라 준공과정도 사진으로 첨부해 제출해야 했다.
'와~ 이걸 혼자서 다 했다고????'
파일을 살펴보다가 입이 쩍 벌어지며 드는 생각이었다. 2019년 당시, 몇 번의 시행착오는 있었겠지만 서류심사가 통과되어 무사히 비닐하우스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농사만 지으리라 생각하며 귀농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서류 작성의 달인이 되어가는 듯했던 초보농부님이었다.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 가능한 귀농인들도 있다. 부러운 위치의 농부님들이다.
2019년 6월, 봄 밤호박 수확 후 손질하느라 바쁜데 초보농부님이 비닐하우스 앞에서 사진을 찍어 달란다.
'물 마실 시간도 없이 바쁜데 사진은 뭔 사진'
요령 없이 일하던 때라 정말 바빴고, 초보농부님의 말에 얼굴이 일그러졌었다. 사실 사진 찍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나도 참 마음이 좁쌀 같았다. 당시 초보농부님이 블로그를 운영 중이라 포스팅에 사용할 사진인가 싶었지만, 지금 와서 알고 보니 증빙서류에 넣을 사진이었다. 어디에 사용될 사진이며, 어떤 각도, 어떤 물품들이 사진에 나와야 하는지(증빙서류 제출 사진은 조금 까다롭다) 설명을 해 줬더라면 한 방에 끝났을 일을 불평이 가득 담긴 입이 튀어나온 채로 여러 번 사진을 찍은 기억이 있다.
초보농부아내의 시점에서 보자면, 당시 초보농부님은 낮엔 농사짓고 사무장 업무 보며 꼬장꼬장한 어르신들 대접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아이들과 내가 잠자는 동안 공부해서 빈칸을 메워가며 서류를 작성했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시기였던 것 같다. 우리의 조건과 환경이 열악했지만 노력해 준 초보농부님 덕분에 지금은 세 동의 비닐하우스에서 실한 밤호박들을 매년 주렁주렁 매달아 고객님들의 식탁으로 배송해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농부님아, 고생했시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