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비 거금지출 후, 마음속 시동을 켜다

1부. 시작은 늘 작은 용기에서 온다

by 농부아내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다.

그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결심이라기보다, 일상의 잔상에 가까웠다.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아무 일도 아닌 며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오며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아직은 괜찮아”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낼 수 없었다.


귀농 초, 밤호박 농사일을 배울 때까지만 해도 그나마 남편의 일정이 빡빡하지 않아 얹혀서 이동하는 것이 마음의 짐이 되진 않았다. 겨울은 ‘농한기’라고 알고 있었지만, 막상 농사를 지어보니 농번기만큼은 아니어도 일은 여전했다. 일 년 농사의 흐름에 조금 적응하니 겨울에는 적어진 일 덕분에 시간 여유가 생겼다. 남편은 이때가 기회라며 내게 운전면허를 따보라고 권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편안한 조수석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설득했다. 아직은 괜찮다고, 시골에서 산다는 건 원래 이런 거라고 말이다.


농사일에 익숙해지고, 지원사업에 도전하고 여러 가지 일을 시작하면서 남편의 어깨가 무거워지는 만큼 ‘김기사’를 불러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면서 상황은 더 분명해졌다. 등하교는 물론이고 병원에 가야 할 때, 약속 장소가 읍에 있을 때, 언제나 이동은 하나의 큰 과제가 되었다. 사소한 일정 하나에도 미리 계획을 세워야 했고, 그 계획에는 늘 남편의 시간이 함께 들어가야 했다.


남편이 바빠 아이들 픽업을 못할 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버스를 타기에는 시간대가 맞지 않았고, 돌아오는 시간을 장담할 수도 없었다. 결국 택시를 불렀다. 우연히 검색해서 알게 된 택시기사님을 나의 기사처럼 전화로 면에 있는 우리 집까지 나를 데리러 와 주시기를 부탁했다. 백발의 기사님은 나를 태우고 학교까지 가서 아이들이 마칠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가 아이들까지 태운 뒤 다시 우리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때의 나는, 그래도 어떻게든 해결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 등하교, 읍에서의 만남, 장을 봐야 하는 날. 그때마다 남편의 일정부터 떠올리고, 안 되면 택시를 이용했다. 그 과정이 반복될수록 질문은 점점 구체적인 문장이 되어갔다. ‘이렇게 계속 살 수 있을까.’ ‘이 선택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운전면허는 마음속 할 일 목록 어딘가에 있었지만, 가장 아래에 놓여 있었다.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일, 언젠가는 해야 할 것 같지만 지금은 아니어도 되는 일. 그렇게 분류된 채로 남편이 바쁠 땐 ‘택시’라는 이름의 안락한 불편 속에 시간을 보냈다.

이동권을 남편에게 맡겨둔 채로 시간을 흘려보내던 중, 남편이 일주일이나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요즘 농부님들의 일상은, 밭에만 머무는 삶이 아니었다. 남편의 출장소식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럼, 애들 픽업은 어쩌지?’였다. 나의 선택은 백발의 기사님이었다. 어쩌다 하루만 부탁하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일주일 픽업이었기에 기사님의 일정부터 확인을 했다. 가능하시다고 하셔서 그때부터 하교시간에 맞춰 집 앞에서 기사님을 기다렸다.


차에 오르면 기사님은 아무렇지 않게 미터기를 켰고, 나는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을 보며 괜히 시선을 피했다. 누군가의 운전에 몸을 맡기고, 비용과 시간 앞에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그 모습이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면에서 학교까지, 다시 집으로, 일주일간의 왕복 택시비는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숫자로 바꿔보니 감정이 더 또렷해졌다. ‘불편하지만 괜찮다’고 넘겨왔던 선택들이, 사실은 꽤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실감했다. 그날 이후 택시는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라, 내 선택의 결과처럼 느껴졌다. 내가 운전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대가, 내가 계속 미뤄온 결정의 가격표 같았다. 그리고 그 가격은 가볍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운전면허를 따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었다. 두려움은 그대로였고, 자신감도 없었다. 다만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분명히 달라졌다. 더 이상 “나는 길치, 방향치야”라는 말로 모든 걸 덮어둘 수 없게 된 것이다. 못하는 것과 안 하기로 선택하는 건 다르다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을 건드렸다. 운전을 하지 않으면 잘못 들어선 길이나 경적 소리 같은 상황을 아예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 그건 분명 편안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거금의 택시비를 계산하며 포근하게만 느껴졌던 조수석이 불편해졌다. 안전한 대신, 계속해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자리라는 생각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이전처럼 운전 이야기를 흘려보낼 수 없었다. 어떤 변화는 완벽한 준비가 끝난 뒤가 아니라, 더는 미룰 수 없을 때 시작되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은 아직 결심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설펐고,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마음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시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켜진 적 없던 마음속 엔진이 미약하게나마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먼저 시동이 걸렸다.

아직 운전석에 앉을 용기는 없었지만, 적어도 뒤로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의 택시비는 그렇게, 나를 다음 장으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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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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