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시험, 뜻밖의 일사천리

1부. 시작은 늘 작은 용기에서 온다

by 농부아내


마음속에서 시동이 걸렸다고 곧바로 모든 게 술술 풀리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더 이상 운전 이야기를 농담으로 넘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마음 속 문장이 “나는 원래 안 해”라는 말 대신, “아직 안 했을 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귀농 후 두 번째 가을 농사가 끝나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남편은 또다시 내게 ‘운전면허’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이 그나마 시간이 있고, 시골이라 코스도 단순하고, 도시만큼 차들이 도로에 북적이지 않아 면허 따기가 수월하다고 했다. 무엇보다 학원비를 결제해 주겠다고 했다. 마음속 문장이 “그래, 하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곧바로 학원을 찾아가 등록을 하면 너무 얌체 같으니 며칠 고민하는 척 한 뒤 남편과 함께 학원을 방문했다.


학원 등록을 마치고 며칠 뒤,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필기시험 문제집을 사 왔다. 얇고 가벼운 기출문제 위주의 책이었다. 표지를 넘기며 문제들을 훑어보는 순간, 나는 멍해졌다. 마치 ‘결심했으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문제들을 보니 숨이 막혔다. 농사일이 줄어든 겨울이긴 해도 아이들 챙기고 집안일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그래서 면허 시험을 준비한다는 건 여전히 나와는 거리가 먼 일처럼 느껴졌다.


문제집은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가, 책상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책장 한 칸을 차지했다. 집안일을 하다 문제집이 보이면 애써 다른 데를 보았다. 오늘은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주말쯤이면 보게 되겠지 하며 미뤘다. 마음속 시동은 걸렸지만, 몸은 여전히 미적거리고 있었다. 한 장이나 제대로 풀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한 내에 다 풀고 시험을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문제집 대신 핸드폰을 들었다. 혹시 요점만 정리된 자료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다 우연히 운전면허 필기시험 어플을 발견했다. 연필도 필요 없고,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을 필요도 없다는 설명이 눈에 들어왔다. 반신반의하며 설치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생각보다 자주 핸드폰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 국이 끓기를 기다리는 몇 분, 잠들기 전 침대 위에서. 틈만 나면 문제를 하나씩 풀었다. 처음에는 틀리는 문제가 많았고, 정답을 봐도 고개가 갸웃해지는 문항도 있었다. 틀리면 또 나오고, 또 틀리면 또 나왔다. 겉으로 보기엔 핸드폰만 만지는 사람 같았겠지만, 나름대로는 꽤 성실한 공부였다. 문제집을 한 장씩 넘기며 연필 쥔 손에 힘을 줘야 했던 예전의 공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세상이 정말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 지나자 변화가 느껴졌다. 문제를 읽는 속도가 빨라졌고, 보기가 낯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문제를 풀며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이건 아까 나왔던 거잖아.’ 그런 순간들이 쌓이자 아주 미세한 자신감이 생겼다. 정답의 갯수가 많아질수록, 적어도 ‘아예 모르겠다’의 단계는 벗어난 것 같았다.

필기시험 날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학원에서 다 함께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차 안에서는 찬 바람이 부는 날씨에도 손에 땀이 맺혔다. 시험장에 도착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았을 때, 남편이 사 준 문제집을 거의 펼쳐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잠깐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미 와 버린 이상,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며 탈락하면 다시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모니터를 켰다.


감독관의 지시에 따라 시험이 시작되었다. 어플로 공부해서인지 방식은 낯설지 않았다. 몇몇 문제는 여전히 헷갈렸지만, 대부분은 여러 번 만났던 질문들이었다. 시간을 꽉 채워 고민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대충 풀지도 않았다. 내가 준비한 만큼, 그 범위 안에서 문제를 풀었다. 문제를 하나씩 넘길수록 손에 맺혔던 땀이 조금씩 말라갔다.


결과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나왔다. 한 번에 합격, 점수도 나쁘지 않았다. 시험이라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마음앓이를 며칠씩 해야 했던 세대를 살아온 나로서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바로 결과를 알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믿기지 않아 점수를 다시 확인했다.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들 각자의 시험 결과를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나는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는 안도감과, ‘이게 되네’라는 묘한 기분이 동시에 밀려왔다.


돌이켜보면, 필기시험 준비 과정은 내가 생각했던 ‘도전’의 모습과는 달랐다. 이를 악문 결심도, 계획표에 빼곡히 적힌 공부 시간도 없었다. 다만 상황에 맞는 방법을 찾았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했을 뿐인데 결과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물론 이 합격이 모든 두려움을 없애준 건 아니었다. 기능시험과 도로주행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답답해졌다. 운전대, 브레이크, 방향지시등. 이제는 머리로 아는 걸 몸으로 해야 하는 단계였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해졌다. 막연히 겁내며 미루던 일도, 시작해 보면 이렇게 한 칸쯤은 앞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걸린 시동은 아직 공회전 중이었다. 갑자기 속도를 낼 자신도 없었고, 운전석에 앉는 순간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다만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는 막연한 믿음에서 이제는 운전대를 잡아도 조금은 확신이 생길 것 같았다.


필기시험은 그렇게,

나를 운전석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이제 남은 건, 문을 열고 앉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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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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