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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Sep 21. 2015

헤르만 헤세의 꿈을 조각한 남자, 베른하르트 랑

작가를 짓다 - 4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편안한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들지 않을 때가 있다. 피곤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눈이 감기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저 불규칙하게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시끄러워 잠이 들지 않는 그런 때가 있다.

여기 오늘 이야기할 작가 역시 그렇다. 때로는 자신의 창작욕 때문에, 때로는 거친 반항심 때문에, 또 때로는 사회에 대한 절망 때문에 끊임없이 위기를 겪은 작가. 오늘 이야기할 작가는 ‘위기의 작가’ 헤르만 헤세다.


헤르만 헤세. 그는 1877년 독일 칼브에서 태어났다. 흔히 알고 있는 그의 반듯한 외모처럼 그의 집안 역시 반듯했다. (물론 너무 지나치게 반듯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 헤세의 아버지는 개신교 선교사였고 할아버지는 인도에서 선교와 학교설립 사업을 진행했을 정도로 선한 일을 많이 했다. 그런 집안 분위기는 때로는 너무 지나쳐 조금의 이탈도 허락되지 않았다. 헤세는 그런 갑갑한 분위기 속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다.


헤세는 어린 나이부터 범상치 않은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가 4살이었을 때 헤세의 어머니는 “이 4살의 아이는 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지력과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헤세는 일종의 천재성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천재라 믿으니 신빙성이 떨어지긴 한다) 거짓말 같아 보이지만 우리로 치면 초등학생 시절에 이미 라틴어로 시를 짓는 일을 즐겼으니 헤세의 어머니 말이 자식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헤세는 학교수업을 곧잘 따라갔고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지만, 학교라는 조직을 굉장히 싫어했다. 불행히도 헤세는 학교에서 그리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천재 아이가 주는 불편한 거부감이 교사들로 하여금 헤세를 미워하게 만든 것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헤세는 교사들에게 잦은 체벌을 당하는 등 그의 학교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헤세가 이렇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집에서 겪은 지나친 규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헤세는 자신의 자서전에 “나는 아무리 옳고 좋은 취지의 것이라 할지라도 규율이라고 하는 것에는 무조건 반항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밝혔는데 그런 그였기에 학교라는 조직과 그 안에서 견뎌야 했을 규칙이 얼마나 맞지 않았을지 알 수 있다.



같은 이유로 헤세는 13살 때 마울브론 수도원의 개신교 기숙학교에 들어가서도 7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을 나온다. 이 당시 헤세는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이 일을 발단으로 그의 인생 첫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개신교 기숙학교를 도망 나온 헤세를 부모님은 루터교 목사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에게 보낸다. 헤세의 반항심은 그곳에서 절정에 달했고 우울증 증상마저 겪으면서 자살기도를 하는 등, 온갖 기이한 행동을 하며 문제를 일으킨다.



그런 헤세를 지켜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목사는 그를 정신 요양소에 보내길 추천했고 헤세의 부모는 결국 슈테텐에 있는 정신요양소로 헤세를 입원시킨다. 헤세는 그곳에서 4개월 동안 치료를 받는데 진단 결과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 당시 헤세는 병원 내에서 가족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중 아버지에게 보내는 헤세의 편지 한 통을 읽어보자.


존경하옵는 당신께!

당신께서는 유별나게 기꺼이 희생하는 태도를 보이시니, 제가 당신께 7M이나 권총을 부탁해도 되겠지요. 당신께서는 저를 절망에 빠뜨린 이후로 하루 빨리 그 절망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준비가 되어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6월에 이미 죽었어야 할 목숨이지요.

당신께서는 "네가 슈테텐에 대해 욕을 한다고 해서 너를 전혀 비난하지는 않는다."고 편지를 쓰셨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게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욕할 권리는 염세주의자에게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권리이므로 빼앗아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이상한 단어이며, 저는 그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정말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하는 누군가를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그런 사람을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당신이 제게 조언을 해주실 수는 없는지요… 당신과 저의 관계는 점점 긴장이 더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인간이 아니라 경건주의자라면, 또 저의 모든 성격과 성향을 지금과는 정반대로 바꾼다면, 저는당신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으며 또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범죄를 저지른다 해도, 헤세 선생님, 당신이 제게서 삶의 기쁨을 앗아가 버렸으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책임입니다. "사랑스런 헤르만"이 전혀 딴 사람, 즉 세상을 증오하는 자, "부모가 살아있는 고아"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제게 편지를 보낼 때 "사랑하는 H."와 같은 표현을 한번도 쓴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쓴다면 그건 뻔뻔스러운 거짓말이겠지요.
감독관이 오늘 두 번이나 제게 왔다 갔지만, 저는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종말이 결코 머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면 무정부주의자들만 존재할 것입니다. 슈테텐의 형무소에 갇혀 있는 H. 헤세.
저는 이 사건에서 누가 어리석은 것인지 생각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여하튼 당신께서 이따금씩 이곳에 들러 주셨으면 좋겠군요.

Brief aus Stetten-1892년 9월 14일에 슈테텐 요양소에서 헤르만 헤세가 부친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헤세가 당시 얼마나 날카로운 상태로 시간을 보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헤세는 가족을 진심으로 증오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헤세가 자신이 가진 문제의 원인을 집안에서 찾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헤세는 이런 반항과 방황의 시기를 겪으며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김나지움(독일의 인문계 교육기관)을 들어가기도 하지만 어디서고 헤세는 버텨내지 못했다. 하지만 헤세는 정규교육 대신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고서적과 문학 작품들을 읽으며 스스로 원하는 배움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는 대신 서점과 시계공장 등에서 일을 해보기도 하지만 시인이 되고자 했던 그의 열망 때문인지 생계를 위한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헤세는 “나를 데리고 있으려는 학교는 하나도 없었으며, 나는 어떤 견습 교육도 견뎌내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헤세가 꾸준히 그리고 폭발적으로 열정을 쏟은 것은 작문 활동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세계문학과 철학에 깊이 빠져들었던 헤세는 끊임없이 시를 지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899년 그의 첫 시집 『낭만의 노래』가 출간된다. 헤세는 계속 시를 지으면서 일간지와 잡지에 기사와 평론을 기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1904년 그가 26살이 되는 해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발표한 헤세는 유명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발표 후 큰 인기를 끈 이 작품을 바탕으로 헤세는 더는 서점이나 시계공장 일을 하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26살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마주한 성공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맛본 성공의 시기였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헤세의 반항적인 태도와 불규칙한 행동에 지쳐있던 가족과 친구들은 다시 그의 곁으로 다가와 주었고 상냥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무엇보다 이 성공이 헤세에게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조급하기만 했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안정된 마음과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헤세는 자서전에서 그 시기에 이르러서야 ‘만족'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런 평온한 생활은 헤세의 작품 활동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헤세는 이 시기에 『수레바퀴 아래서』 등 훗날 자신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써내려가고 신문 기고글 역시 꾸준히 발표한다. 그야말로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헤세의 전성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헤세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고 그의 삶에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이번 위기는 시인만이 되고자 했던 첫 번째 위기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거친 바람을 몰고 왔는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그는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상황에 큰 상처를 받는다. 사실 헤세는 스스로 정치적인 작가가 아니라고 밝혔듯 정치적 활동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다만 자신의 조국을 지배하던 전제군주인 빌헬름 2세를 비판하는 글을 상당수 기고했고, 스스로 평화주의자임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그런 성향의 헤세였기에 전쟁이 발발하고 조국 독일이 침공을 시작하자 독일의 행동에 비판적인 칼럼을 끊임없이 기고했다. 하지만 당시 독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1차 세계대전을 ‘위대한 시대'라고 부르며 전쟁을 찬양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헤세는 ‘제 둥지를 헐뜯는 자’, ‘조국의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헤세 역시 신문으로 발표되는 다른 지식인들의 전쟁 축복 기사나 교수들의 호소문, 시인들의 전쟁 시를 보며 슬픔에 잠겼다.


이 시기에 헤세는 심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전쟁포로들을 위해 책을 공급하고 잡지를 발행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스위스에 있었던 헤세의 집은 헤세와 뜻을 같이하는 지식인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당시 헤세의 집에서 도움을 받은 이 중에는 헤르만 헤세, 슈테판 츠파이크와 함께 독일의 3대 문호로 손꼽히는 『마의 산』의토마스 만 작가도 있었다. 토마스 만 작가는 이 시기에 헤세와 만남을 가지며 헤세의 인간적인 모습과 문학에 깊이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전쟁에 반대하는 행동을 안팎으로 이어간 헤세는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크게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헤세에게 부친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이 찾아오자 헤세는 또 한 번 충격을 받게 된다. 거기에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베르누이는 정신 분열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셋째 아들 마르틴은 뇌막염을 앓으며 위기를 겪게 된다.

결국, 헤세는 인정받는 작가에서 매국노 작가로 낙인 찍히고, 세상은 전쟁으로 물들어가고, 가족들은 죽음으로 다가가는 상황에서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헤세는 이 시기에 이런 마음이 들기도 했다.


“글을 쓰는 것도 더는 내게 진정한 기쁨을 주지 못했다.”


이런 위기의 상황을 맞아 헤세는 정신분석 치료를 결심한다. 그리고 당시 정신심리학의 권위자였던 카를 구스타브 융을 만나게 된다. 융의 소개로 헤세는 그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 박사를 만나게 된다. 헤세는 랑 박사와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하는데 랑 박사는 융 학파의 이론에 따라 헤세를 상담해주었다. 랑 박사의 치료 중에 가장 중요한 행동은 ‘꿈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자신이 꾼 꿈을 글로 적어내는 일인데 헤세는 이 상담을 이어가던 어느 날, 운명적인 꿈을 꾸게 된다.


 1917년 9월 11일 밤.

정확히 어딘지 모를 도시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헤세.
그는 길에서 데미안(정확히 들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이라는 이름의 괴한에게 공격을 받는다.
헤세는 술에 취한 듯 보이는 데미안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싸움에 지고(역시 평화주의자라 그런지 싸움에 약하다) 서류가방을 빼앗겨 버린다.
데미안은 서류가방을 가져가며 “이것을 패배의 전리품으로 생각하라”고 전하며 길을 떠났다.


헤세는 이런 꿈을 꾸고 곧장 랑 박사와 꿈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데미안'이라는 이름에 집중했는데 데미안은 ‘악의 특성을 포함하는 신'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데몬’과도 비슷하고 ‘창조주 또는 예술가'를 뜻하는 데미우르크와도 비슷했다. 헤세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두고 『데미안』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의 솜 강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작가를 짓다 2화 - ‘톨킨’ 편에 등장한 바로 그 전투)에서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목숨을 잃은 것을 본 후, 헤세는 『데미안』을 몇 주 만에 집필해 낸다. 이렇게 완성된 『데미안』에는 그가 꿈에서 본 데미안이 등장하는데, 헤세는 데미안에게서 창조주와 악의 모습을 동시에 투영해 냄으로써 선과 악은 동시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개인 안에 잠재한 그것을 발견해 내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헤세는 『데미안』의 집필을 완성하고 자신의 이름 대신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발표를 한다. 그 이유는 『데미안』을 읽을 젊은이들에게 이 글이 어느 늙은 작가의 작품이 아닌, 그들과 같은 청년의 글이자 메시지로 전달되기 바랐기 때문이었다.

『데미안』은 그의 바람대로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고, 그야말로 당대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놀라운 판매 행진은 물론이고 평론가와 동시대의 작가들에게도 이 작품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없는 작가의 존재를 모르는 그들은 『데미안』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쓴 이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토마스 만 작가는 출판사에 거듭 채근을 하며 작가의 정체를 물어봤을 정도로 『데미안』에 푹 빠졌다고 한다.


이런 이슈가 발생하고 있을 때, 『데미안』의 진짜 작가가 헤르만 헤세라는 사실을 알아챈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칼 융이다. 융은 랑 박사와 헤세의 심리 상담을 알고 있었고 책에 등장하는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 가 랑 박사를 모델로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융은 헤세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발설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데미안』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데미안』은 랑 박사와의 심리 상담과 정신분석학이 헤세의 문학을 만나 빚어진 걸작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데미안』에는 융 학파의 정신분석학에 등장하는 요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장면의 상징,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 선과 악의 세계,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개개인의 이상적인 자아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개성화의 과정'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성화의 과정’은 쉽게 말하면 진정한 자아를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데미안』을 보면 싱클레어가 몸으로 체험하는 이야기와 그가 내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이라는 존재를 만나는데 이 데미안은 헤세가 꿈에서 본 데몬이자 데미우르크의 모습을 동시에 투영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싱클레어의 입장에서 데미안은 두 가지 모습을 온전히 외면으로 보여주고 있는 데미안이 자신이 꿈꾸는 진정한 자아였던 것인데 작품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키스를 하며 내적 자아와의 만남, 즉 개성화의 과정이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데미안』의 장면들과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당시 젊은이들에게 왜 그렇게 찬사를 받을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변으로는 그 시기 젊은이들의 고민을 정면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라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갑자기 벌어진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젊은이들에게 눈에 보이는 외적 환경에서 어떤 희망을 찾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데미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외적 환경은 언제든 변화한다. 특별한 경우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적 자아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을 잃은 게 아니다.” 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메시지를 통해 당시 젊은이들은 폐허가 된 땅 위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곧 삶의 원동력이 되었기에 『데미안』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젊은이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헤세 하우스의 입주자들.

헤세 하우스의 입주할 첫 번째 인물로 한국의 가수 루시아를 꼽아봤다.

루시아는 고전 문학 마니아로도 잘 알려졌는데 그녀는 정규 1집 타이틀 곡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동명의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정규 2집 타이틀 곡으로는 헤세의  『데미안』과 동명의 곡을 발표했다. 루시아는 『데미안』을 읽고 느낀 생각과 감정을 담아 노래를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헤르만 헤세의 팬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존경하는 예술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예술로 헌정을 하는 일은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일이기에 루시아를 첫 번째 입주자로 꼽아 봤다.


두 번째 입주자는 앞서 잠깐 이야기한 토마스 만.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 독자들에게 대문호로 인정받은 토마스 만은 헤세에 앞서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헤세의 집에 피난을 가서 생활하기도 했고(진짜 헤세 하우스의 입주자!),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기 10년 전부터 스웨덴 한림원에 헤세를 끊임없이 추천하는 등 헤세를 위한 활동을 지속해나갔다. 그 결과 헤르만 헤세는 세계 2차대전이 종전된 이후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런 노력과 헤세 문학을 향한 존경심을 높이 사 두 번째 입주자로 꼽았다.


마지막으로 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은 젊은이들을 헤세 하우스의 입주자로 꼽고 싶다.

1, 2차 세계대전은 물론이고 한국전쟁, 베트남전, 걸프전 등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전쟁은 그야말로 한순간에 인간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고 있다. 눈에 보이던 것들의 존재를 믿을 수 없어 방황하게 된 젊은이들에게 믿을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밖에 없었고, 『데미안』은 그 사실을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몇 명의 젊은이들이 『데미안』을 보고 삶의 원동력을 다시 찾았는지 셀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있어 헤세의 글과 이야기는 반드시 머리맡에 두고 있어야 할 어떤 것일 테니 그들을 헤세 하우스의 입주자로 꼽으려 한다.



마치며.

지금까지 헤르만 헤세와 그의 대표작 『데미안』 그리고 『데미안』의 탄생에 결정적인 조력을 한 베른하르트 라 박사의 이야기를 해보았다.

헤세의 문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데미안』의 발표를 기점으로 헤세는 새로운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헤세 역시 흔들리던 시절 받은 정신 분석 상담과 그를 기반으로 완성해낸 『데미안』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했다고 말하고 있다. 헤세는 이 시절 “세상과 잘 타협하며 살 때 누린 평화는 세계의 표면적인 평화와 마찬가지로 위태위태한 것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헤세가 『데미안』을 집필하기 전까지는 모든 문제를 외부에서 보고 그 문제들과 타협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헤세는 두 번째 위기를 맞은 시점에서는 랑 박사와의 정신 분석 상담과 꿈속에서 만난 ‘데미안'이라는 존재를 통해 흔들리는 자신의 문제를 내부에서 찾아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헤세는 위태로운 평화가 아닌 흔들리지 않고 굳은 내적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만약 이 과정을 훌륭히 함께해준 랑 박사의 조력이 없었다면 헤세는 그가 말했듯이 여전히 위태로운 평화의 배 위에서 흔들리며 살았을 것이고, 『데미안』 역시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가정은 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에 그렇게 됐다면 어땠을까?

헤세는 물론이고 『데미안』을 통해 위로받고 삶의 의미를 찾았던 젊은이들은 위태로운 평화의 배 위에서 흔들리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랑 박사가 헤세의 꿈을 깨워준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은 문학사에 중요하게 기록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헤세 하우스 입주자 여러분께.’

헤세 하우스의 껍질 안으로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에서는 껍질처럼 얇은 외벽과 지붕이 여러분을 감싸줄 것입니다.

덕분에 바람은 쉴 새 없이 벽을 흔들리게 할 것이고,

태양은 얇은 지붕을 지나 여러분의 피부에 맞닿을 것입니다.


불안하겠죠.

편안한 침대에 누워 있는 그 순간에도 심장 소리가 끔찍한 음악처럼 울릴 것입니다.

하지만 가짜 타협은 안 됩니다.

거짓된 생각으로 벽을 두껍게 쌓고, 지붕을 덧대면 안 됩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가짜 타협이 아닌 깊은 잠입니다.

어서 침대에 누우십시오.

그리고 끔찍한 심장 소리의 볼륨을 높이십시오.

당신의 심장 소리가 껍질을 깨부수는 해머 소리를 감출 수 있게.

볼륨을 높이십시오.


심장과 해머 소리.

그 강렬한 굉음에 귀가 멀 때쯤.

각 방에 놓인 벽 거울 앞에 서십시오.


그럼 보일 겁니다.

저라는 늙은 인간이 남겨놓은 메시지가 아닌,  

당신이라는 한 인간이 마주해야 할 신의 모습이.



<팟캐스트 '책 읽는 라디오' 2015 가을 개편>

'작가를 짓다' 4화   

(방송 듣기)

http://goo.gl/MNB1Da



<참고자료>

『데미안』 문학동네

『데미안』 열린책들

'헤르만 헤세 포탈' https://www.hermann-hess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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