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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Jan 18. 2018

저승

14 Jan, 2018


누구나 믿을 수는 있지만, 누구도 증명하지 못하는 세계. 인간이기에 알 수 없는 그런 세계가 있다. 외계인의 세계가 그럴 테고 저승 역시 마찬가지다. 갈 수는 있지만 돌아오지 못하기에 상상만으로 추론해야 하는 세계. 그렇기에 나라마다, 민족마다, 혹은 가족마다 저승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다. (물론 존재 자체를 거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픽사가 그리는 저승은 어떤 모습일까? 기본적으로는 이승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설정이다. 저승의 세계는 이승만큼 드넓으며 그곳에서도 각자 직업이 있고 술을 마시며 다양한 취미 활동까지 한다. 심지어 죽음도 맞이한다. 픽사는 이렇게 구축한 저승의 세계관 안에서만 이야기를 풀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극적이길 바랐는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고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그 고리를 통해 주인공 미구엘(제목인 코코는 미구엘의 증조할머니 이름이다)이 저승으로 향한다. 이때 미구엘에게는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야 하는 제약 조건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조건 아래서 펼쳐지는 미구엘의 활동이 이 애니메이션의 줄기가 된다. 


영화 리뷰를 하려는 의도가 아니기에 줄거리보다는 ‘저승’이라는 설정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영화 속 저승과 이승을 이어주는 것은 꽃길이다. 멕시코의 전통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속 미구엘의 가족들은 조상을 위해 아름다운 꽃잎을 집까지 뿌려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한다. 그 꽃길을 걸어 조상들은 후손들의 집에 오고 ‘죽은 자의 날’을 즐거이 보낸다. 


하지만 이 꽃길을 걷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후손들이 꽃잎을 뿌려두지 않아서? 그렇다면 꽃잎을 구할 수 없는 곳에 사는 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혹은 꽃잎을 살 경제력이 없는 후손들은 어쩌란 말인가. 픽사는 <코코>가 가족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고 친절히 물질적인 것이 가족과 조상을 연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다. 대신 이승과 저승, 가족과 가족, 조상과 후손을 연결해주는 것은 ‘기억’이라 말하고 있다. 


<코코>에서 죽은 자가 이승의 꽃길을 걷기 위해서는 출국심사를 받아야 한다. 출국 심사의 조건은 단 하나. 그의 사진이 이승에 모셔져 있느냐의 여부다. 영화 속에서는 제단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만 예상하건대 지갑이라든지, 품속이라든지 간직하고 싶어하는 이가 사진을 꼭 안고 있다면 출국심사는 통과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마저도 없는 이들, 자신의 사진을 간직해줄 이가 없는 이들. 그들은 영원히 저승에서만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승 세계의 또 하나 중요한 사실. 저승에 온 그들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소멸’한다고 표현된 저승의 죽음. 그것을 불러오는 단 하나의 조건은 ‘잊혀짐’이다. 이승에서 자신을 기억하는 이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영혼은 저승에서마저 소멸한다. 

사진과 기억. 이 두 가지를 저승과 이승의 연결고리로 삼은 것은 픽사의 영리한 결정이었다. 다양한 신과 다양한 풍습으로 그려지는 저승을 이토록 보편적인 조건으로 풀어냄으로써 픽사는 세계 어디에서도 통할만 한 저승을 구축해낼 수 있었다. 조상을 기리는 어떤 모습에서도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거나 그들의 기억을 되돌아보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 두 가지가 없다면 사실 기리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행동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기억한다는 말. 

누군가는 그 말이 너무 흔해졌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그 말을 지겨워하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만약 <코코>를 보여준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별 것 아닌 이야기를 길게도 하네.”


그런 이들에게 <코코>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라면 조금 더 오래 나누어도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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