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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Jan 19. 2018

⎨COVER STORY⎬
"저승으로 가는 길"

BOOKDIO COVER STORY


생의 반대편. 그곳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믿음. 그것은 속박의 산물이다. 이 믿음의 산물은 얼굴이 다양하다. 종교에 따라서, 가문에 따라서, 혹은 가족이나 개인에 따라서 각자 다른 모습으로 그곳을 그린다. 이 세계는 누구도 증명할 수 없다는 필수조건 덕분에 이렇듯 다양한 모습이 모두 사실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생의 반대편. 그곳을 향해 가는 길 역시 제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배로, 누군가는 계단으로, 또 누군가는 날개로...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도구를 통해야만 그곳에 도착할 수 있다. 물론 그 도구를 얻는데 물질적인 것이 필요하지는 않다. 생처럼 그저 주어지는 것. 저승으로 가는 길의 도구는 그렇게 그저 주어지는 것이다. 


저승으로 가는 길. 이 길을 대표하는 속성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물질적 도구가 아닌 수학적 층위가 필요하다. 더 쉽게 말하자면 가로와 세로. 그것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가로부터 살펴보자. 그것이 덜 슬프니까. 


가로의 속성을 대표하는 것은 '다리'다. 다리는 기본적으로 떨어져 있는 두 세계를 가로로 연결해준다. 이것으로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려는 이들의 마음은 온순하다. 그저 두 세계를 잇고 싶은 마음. 그것이 전부다. 그렇기에 다리 위에 융단처럼 깔리는 도구 역시 아름답다. 


애니메이션 <코코>를 들여다보자. 픽사가 죽음을 다룬 최초의 작품 <코코>. 이 작품에는 당연히 저승의 세계가 등장한다. 그리고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것은 넓고 아름다운 다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저 넓고 튼튼한 다리다. '아름다움'은 저승의 세계가 채워주지 못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이승의 세계가 채워줘야 한다. 이를 위해 <코코>의 배경인 멕시코의 사람들은 '죽은 자의 날'이 되면 가족의 제단까지 오는 길을 아름다운 꽃잎으로 채운다. 살아있는 자들이 뿌린 꽃잎은 그대로 다리에 쌓인다. 그렇게 다리는 연결이라는 기능적 측면뿐 아니라 아름다움이라는 미학적 측면을 채워나간다. 이같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다리. 이것으로 또 다른 세상을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저승은 전복의 대상이 아니다. 그곳은 휴식의 공간이자, 기억의 공간, 그리고 재회의 공간이다. 


그래서일까? <코코> 속 저승은 빛으로 가득하다. 죽은 자의 공간에 가득 찬 빛.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생의 끝은 빛의 차단과 함께 시작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저승에 가득 찬 빛.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당연히 산 자들에게서 온다. 산 자들은 오전 내 모은 빛을 다리를 통해 저승으로 보낸다. 모아놓은 빛 전부를 보내더라도 상관없다. 산 자들에게는 오후의 빛도 허락되니까. 이것 역시 가로로 연결된 다리가 있어 가능하다. 만약 다리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자. 


누군가의 저승은 세로로 연결된다. 세로를 대표하는 것은 계단이다. 계단은 숫자의 여부와 상관없이 일종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층위는 산 자와 죽은 자. 서로가 정면으로 마주 보지 못하게 한다. 층위가 생김으로써 필연적으로 한쪽은 위를, 다른 한쪽은 발보다 낮은 아래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단으로 저승을 그리는 이들은 두 세계가 단절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위를 보며 기도하거나 아래를 보며 기릴 수는 있을지언정, 두 세계가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산산이 깨버리려는 이들은 스스로 계단 아래로 향한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이는 바로 오르페우스다. 오르페우스의 아내 에우리디케는 아리스타이오스의 구애를 받았지만, 남편 오르페우스와의 사랑을 간직한 채 이를 거부한다. 거부의 대가는 죽음.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한 세상을 멸망시키기 충분한 분노의 것이었다.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장기인 리라를 연주하며 하데스에게 말한다. 아내를 돌려달라고. 하지만 하데스는 층위의 저승을 믿는 자. 그에게 두 세계는 이어져선 안 되는 세계였다. 하지만 신은 언제나 간교하며 장난을 좋아했다.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의 리라 연주 값을 지급하려는 듯 그의 지옥행을 허락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직접 아내를 찾아가라고 말한다. 에우리디케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던 오르페우스는 계단을 밟고 지옥으로 내려간다. 층위를 벗어나 다시 재회한 두 사람. 오르페우스는 기쁨에 겨워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다시 계단을 오른다. 그런데 이때, 지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단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본다면 에우리디케는 영원히 지옥에 빠질 것이다."


간단해 보이는 이 조건에는 함정이 있었다. 한 칸의 계단을 오를 때마다 한 칸의 유혹이 오르페우스를 집어 삼키려 했다. 오르페우스는 질끈 눈을 감아야 했다. 두 눈을 파내 버릴지언정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한 칸, 한 칸. 그리고 마지막 한 칸을 내디디려는 순간. 오르페우스는 깨달아야 했다. 이곳은 층위의 저승. 연결을 허락지 않는 세로의 세계라는 것을. 


오르페우스는 결국 뒤를 돌아본다. 그것 역시 아내의 안위를 걱정한 마음 때문이었지만 층위는 그것을 인정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에우리디케는 다시 계단 아래로 영원히 빨려 내려갔다. 이것은 애당초 오르페우스에게 승산이 없는 게임이었다. 만약 에우리디케가 갇힌 저승이 <코코>의 저승처럼 다리로 연결되었다면. 에우리디케가 추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추락한 것은 그곳이 층위로 이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르페우스가 실수한 것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뒤를 돌아본 것이 아닌, 층위의 저승이 가진 속성을 간과했던 것이리라. 


그렇게 오르페우스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그와 함께 소설가 줄리언 반스도 현실의 침대에서 깨어난다. 아내 팻 캐바나를 잃은 줄리언 반스. 그 역시 오르페우스와 똑같았다. 어떤 대가를 지급하는 일이 있더라도 아내를 저승에서 구해올 수 있다면 깊은 층위 따위 상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꿈 속에서 계단을 오르내려도, 심지어 뒤를 돌아보지 않은 순간도 깨어보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은 침대에 그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깨달아야 했다. 계단을 내달려서는 절대 그곳에 도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물론 이미 알고 있었더라도 온 힘이 다 빠진 후에야 물에 뜨는 것처럼 그 역시 모든 힘을 소진할 때까지는 내달려야 했을 것이다. 한참을 내달린 후에 비로소 알게 되니까. 우리는 계단이 아닌 다리를 향해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계단을 내려가는 일. 그것이 죽은 자에게 허락된 길이라면 산 자에게는 다리를 향해 걷는 길이 허락되어 있다. 그것은 하루의 생을 하루만큼 살아내는 길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이틀을 살면 이틀만큼 다리와 가까워지고 반대로 계단과는 멀어진다. 이는 얼핏 그리운 이에게서도 멀어진다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세계와 세계를 연결해주는 길은 가로로만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Written by 최동민
groscalin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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