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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Oct 28. 2015

샐린저를 세상과 연결해준 단 하나의 연결고리, 뉴요커

작가를 짓다 - 9화


작가들은 보통 자신의 작품 뒤에 서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작가와 은둔이라는 단어는 왠지 모르게 잘 어울리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이 작가는 '은둔'이라는 단어를 빼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그런 작가다. 자신의 사진마저 공개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작가 J.D 샐린저가 오늘의 주인공이다.(자신을 전면으로 내세운 이런 글을 보면 샐린저는 싫어하겠지만…)


샐린저는 1919년 뉴욕에서 태어난다. 샐린저의 아버지는 육류 수입업으로 큰돈을 모았다. 덕분에 샐린저는 경제적으로 아무런 불편 없이 자라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샐린저는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한 태도를 보였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샐린저에게 순응적인 태도를 심어주기 위해 매년 오두막 캠프에 보냈다. 그런데 이 캠프는 체력과 창의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캠프여서 샐린저는 되려 자유로운 감성을 키울 수 있었다. 특히 이 이 캠프의 연극 활동에서 큰 활약을 했는데 이때부터 샐린저의 머릿속은 연극으로 가득 찬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연극과 학교 신문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샐린저. 연극에 빠진 그의 모습이 못마땅했던 아버지는 샐린저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밸리 포지 사관학교에 입학시켜버린다. 다정한 어머니 품에서 편안히 자라던 샐린저는 규율투성이인 사관학교에서 힘들어한다. 하지만 사관학교 내에 있던 연극반(아버지도 이건 몰랐나 보다) '가면과 박차'와 학교 연보 '크로스드 사브로'의 편집부 활동을 하며 서서히 적응해 나간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샐린저는 되려 적당히 자신을 제어해 주면서도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밸리 포지 사관학교에 큰 애정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졸업 할 때 직접 노래를 만들어 선물했다고 한다)


밸리 포지 사관학교에서 졸업 후, 샐린저는 뉴욕 대학교에 등록한다. 하지만 갑자기 자유로워진 환경에서 샐린저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는지 낙제점을 받고 만다. 아버지는 그런 샐린저를 보고 유럽에 가서 다양한 경험도 하고 자신의 사업을 배우길 바랐다. 샐린저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유럽에 가서 어느 정도 생활을 하지만 아버지 사업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렇게 유럽에서 다시 돌아온 샐린저는 어시너스 대학에 등록한다. 이 학교에서 샐린저는 칼럼을 쓰며 활동을 했는데 이때 쓴 칼럼 중에는 당시에도 이미 유명했던 헤밍웨이를 비판하는 칼럼도 있었다.


 "헤밍웨이는 뭐랄까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살인자들>, <무기여 잘 있거라> 이후로 일은 적게 하고 실없는 소리만 잔뜩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샐린저는 어시너스 대학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그만둔 뒤 이번에는 컬럼비아 대학에 등록한다. 이곳에서 샐린저는 첫 문학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이름은 휘트 버넷이었다. 문학을 가르치던 휘트 버넷은 <스토리>라는 잡지의 편집자였기도 했다. 이 잡지는 전도유망한 젊은 작가의 글을 소개하는 데 전념한 잡지로 트루먼 카포티도 이 지면을 통해 데뷔했다.


샐린저는 어느 날, 휘트 버넷에게 자신이 쓴 단편소설을 가지고 간다. 샐린저의 소설을 읽은 휘트 버넷은 그의 작품성과 재능에 크게 놀란다. 심지어 "몇몇 이야기는 타자기 앞에서 한 번에 쓴 것 같았다.”고 평할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재능있는 제자와 그를 이끌어주려는 스승의 만남은 추진력이 대단했다.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졌고 샐린저는 그에게서 문학의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샐린저는 이 시기 휘트 버넷을 보며 "스승을 위해서라면 살인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로 좋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던 중 샐린저는 살인의 결과물 대신 자신의 단편 <젊은 친구들>을 보여준다. 버넷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지만, 자신의 잡지 <스토리>에 담아주지 않고 샐린저 스스로 성공을 찾아가는 방법을 유도한다. 그가 추천한 방법은 일단 다른 대중잡지에 원고를 기고하는 방법이었다. 샐린저는 그의 말에 잡지 <콜리어스>에 원고를 기고 한다. 하지만 잡지의 색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만다. 그 후 많은 대중잡지에 기고하지만 단 한 곳도 샐린저의 작품을 받아주지 않는다. 여러 곳에서 거절을 당하자 젊은 샐린저는 크게 낙담하고 만다. 그리고 이때, 휘트 버넷이 구원투수로 나선다. (진작에 좀…)


버넷은 <스토리>에 샐린저의 <젊은 친구들>을 싣는 계약을 진행한다. 샐린저는 이 소식에 얼마나 기뻤는지 버넷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몸이 떨린다."고 표현할 정도로 기뻐했고 "잡지를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크리스마스이브 같았다"며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표현했다.



이렇게 샐린저는 <스토리>를 통해 등단이 아닌 본격적인 데뷔를 한다. 데뷔 후 샐린저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는데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컬럼비아 대학을 중퇴한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샐린저는 데뷔작 이후 작품을 팔지 못한다. 성실히 써 온 작품들이 계속 거절당하면서 8개월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내게 된다. 결국, 샐린자는 다시 한 번 버넷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살아남은 사람들>과 <가서 에디를 만나 봐>라는 단편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번에는 버넷 역시 <스토리>와는 맞지 않는 작품이라며 그의 작품을 거절한다.


믿었던 버넷에게조차 거절을 당하자 샐린저는 불안함에 빠진다. 다행히 이후 몇 편의 단편이 <캔자스시티 리뷰>에 실리면서 샐린저는 작품 활동에 동력을 얻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샐린저는 유람선의 오락팀 직원으로 취직하여 그곳에서 연극 공연을 하거나 부유한 승객의 딸들과 춤을 추는 일을 했다. 이런 생활이 이어지자 샐린저는 자신의 삶과 직업에 큰 불안감을 느낀다. 경제적으로는 부모님에게서 독립하지 못했고, 자신이 최고로 여기는 작품들은 제한적인 발행 부수 때문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데다 그나마 알려진 글은 스스로 판단하기에 수준 이하의 작품들이었다.


샐린저는 이 모든 문제를 잡지 <뉴요커>가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뉴요커>라는 잡지는 에세이, 풍자만화, 시, 소설 등을 게재하는 주간지였는데 철저한 작품 선택으로 인해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유지하고 있던 잡지였다. 샐린저는 <뉴요커>에 자신의 글을 담기 위해서 <뉴요커>에 어울릴만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첫 작품으로 <로이스 타겟의 길었던 데뷔>를 보낸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곧장 거절당하고 만다. 이에 굴하지 않고 샐린저는 일곱 편의 작품을 더 보내지만, 모조리 거절당하고 만다.


이쯤 되면 <뉴요커>에 글을 싣는걸 포기할 만도 했지만 <뉴요커>는 샐린저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꿈꿔왔던 지면이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절치부심한 샐린저는 훗날 콜필드 가족이 등장하는 아홉 편의 작품 중 첫 번째 이야기인 <매디슨에서 시작한 작은 반란>을 써낸다. 이 작품은 샐린저가 크게 공을 들인 작품으로 몇 번이나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그는 이 작품을 쓰면서 너무나 힘들었던 나머지 제목을 "벽에다 머리나 찧을까?"로 정하고 싶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이 작품으로 샐린저는 당당히 <뉴요커>와 계약하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그토록 바라던 <뉴요커> 지면에 자신의 작품이 담겨 출간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출간 직전 진주만 폭격이 벌어진다. 진주만 폭격은 당시 미국인들의 마음마저 황폐하게 하였는데 <뉴요커>는 이런 대중들의 심리를 놓치지 않았다. 샐린저의 작품 <매디슨에서 시작한 작은 반란>은 상류층 자제의 이야기였는데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중들은 이런 이야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때문에 <뉴요커>는 이 작품의 게재를 무기한 연기시키고 만다.


<뉴요커>에 글이 실리기만 기다리고 있던 샐린저는 크게 실망하고 만다. 결국, 샐린저는 입대를 결심하고 전쟁으로 들어간다. 다행히 샐린저는 전투 병과가 아니었기 때문에 군 생활과 작품 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다. 당시 샐린저는 <뉴요커>에 담길 글을 쓰기보다는 대중잡지에 어울리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군 생활과 병행하면서도 돈도 더 많이 버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대중잡지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샐린저는 <포스트>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등의 대중잡지에 원고를 팔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대중잡지가 샐린저를 배신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샐린저는 자신이 작품을 판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그들이 샐린저 작품의 제목을 마음대로 바꿔서 출간한 것이었다. 그들은 <천둥이 칠 때 깨워줘>는 <양쪽 사정>으로, <땅개의 죽음>은 <건전한 상사>로 바꾸어 발표했는데 이는 샐린저와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진행된 일이었다. 게다가 샐린저 작품의 양옆으로는 도색광고가 도배되어 있었으니 샐린저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샐린저는 앞으로 원고료가 아무리 많아도 이런 잡지에는 글을 싣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차라리 무일푼의 무명작가가 나을 것 같다."며 한탄했다. 이런 시련이 이어지자 샐린저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데 그때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온다.



그에게 다가온 이는 <뉴요커>의 편집자 윌리엄 맥스웰이었다. 그는 일전에 전쟁 때문에 게재되지 못했던 <매디슨에서 시작한 작은 반란>을 수정하여 출판하자는 제안을 한다. 가뜩이나 대중잡지에 지쳐있던 샐린저에게 그가 동경하던 <뉴요커>가 손을 내밀자 자존심을 다 버리고 맥스웰의 요구에 따라 작품을 수정한다. 맥스웰의 편집을 통해 결국 이 작품은 1946년 뉴욕에 실린다. 샐린저는 이 사건이 자신의 글쓰기 경력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이제 <뉴요커>의 일원이 된 샐린저는 다음 작품으로 <바나나피시>라는 제목의 짧은 작품을 뉴요커에 보낸다. 이 작품 역시 <뉴요커>답게 편집자들의 수없는 검토와 수정 요구가 이어진다. 거듭되는 수정 요구에도 샐린저는 묵묵히 수정을 이어갔는데 그 이유는 <뉴요커>가 다른 상업 잡지들과 달리, 좋은 작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잡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뉴요커>의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는 <바나나피시>의 제목에 관한 이야기다. 샐린저는 <뉴요커>와의 회의 끝에 작품을 완성하고 마지막으로 제목을 <바나나피시를 위한 멋진 하루>로 정했다. 그러자 <뉴요커> 편집자는 곧장 샐린저를 불러 '바나나피시'를 한 단어로 적을지 둘로 나누어 적을지 회의를 시작했다. 이렇듯 <뉴요커>는 띄어쓰기같이 작은 부분이라도 절대 그냥 넘기지 않고 작가와의 회의를 통해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나나피시'는 결국 붙여서 발표되었는데 두 단어로 나누면 다양한 듯이 중첩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런 노력 끝에 발표된 <바나나피시를 위한 멋진 하루>는 큰 성공을 거둔다.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은 당연히 샐린저의 재능과 노력이었지만 그 뒤에 한 사람의 거대한 도움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을 해준 이는 바로 <뉴요커>의 또 다른 편집자 거스 로브라노 였다.


거스 로브라노는 작품의 편집 능력은 물론이고 사람을 다루는데 천부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는 편집자였다. 그런 그의 능력은 샐린저에게도 큰 도움을 주는데 <바나나피시를 위한 멋진 하루>가 발표된 후, 거스 로브라노는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계약을 샐린저에게 제시한다.


'우선 검토.'

거스 로브라노가 제안한 '우선 검토' 계약은 지금부터 샐린저의 모든 작품은 <뉴요커>가 우선 검토를 할 권리를 갖는 것이었다. 검토 후, 작품을 담을지 아닐지는 <뉴요커>가 결정하는 대신 샐린저에게 연 3만 달러의 비용을 지급하는 계약이었다. 이 계약은 <뉴요커>가 샐린저를 크게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샐린저는 거스 로브라노가 기존에 없던 계약을 만들면서까지 자신과 작품을 인정해주자 너무나 기뻤다. 게다가 연 3만 달러의 돈은 더는 자신이 싫어하는 대중잡지에 글을 팔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샐린저에게 이 계약은 그의 작품 인생을 바꿀 만큼 큰 계기가 된 계약이었다.


이 계약 덕분에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샐린저는 작품에 더 신경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미루어 두었던 장편소설의 집필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쓰게 되는 장편소설의 제목이 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지금까지도 세상 모든 젊은이의 작품으로 불리는 『호밀밭의 파수꾼』은 샐린저가 다른 모든 작품을 활동을 멈추고 매달린 작품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출판할 출판사까지 확정해 놓은 상태였는데 출판사의 이름은 '하코트 브렝스 앤 컴퍼니'였다. 이 출판사의 편집자 로버트 지로는 샐린저에게 단편집을 내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샐린저는 역으로 다른 제안을 하게 된다.


샐린저 씨가 저를 만나러 왔다는 연락이 왔죠.
긴 얼굴에 슬픈 표정을 하고, 짙은 눈이 퀭한 키 큰 남자 하나가 들어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단편집을 먼저 낼 것이 아니라, 지금 작업 중인 소설을 내고 싶습니다."라고요.



샐린저는 지로와 만나 이런 제안을 건넸다. 지로는 샐린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구두계약을 완료했다. 그리고 이어서 영국의 출판사 '해미시 해밀턴'도 샐린저에게 연락을 해 온다. 출판사의 설립자 제이미 해밀턴은 샐린저의 작품 <에스메를 위하여 : 사랑과 누추함을 담아>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직접 편지를 보냈다. 그의 제안 역시 샐린저의 단편집 출판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샐린저는 이번에도 단편집 대신 『호밀밭의 파수꾼』의 영국 내 판권을 가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제이미 해밀턴은 지로가 그랬던 것처럼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출판사의 계약문제도 해결되자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 집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1950년 작품을 완성해낸다. 원고를 받은 지로는 단번에 "대단한 작품임을 알아보고, 그 책의 편집을 맡은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장 출판사 부사장인 유진 레이날에게 원고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이때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부사장 유진 레이날은 원고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레이날 : "홀든 콜필드라는 놈, 미친 거 아니야? 교과서 담당 편집자에게 원고를 넘겼네."
지로 : "교과서라뇨? 이 원고랑 교과서가 무슨 상관입니까?"
레이날 : "기숙학교 학생 이야기일 뿐이잖아요."


이 어이없는 대화가 이어지고 결국 『호밀밭의 파수꾼』은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만다. 이 나쁜 소식을 전하는 자리에서 샐린저는 크게 화를 냈다. 화가 풀리지 않았던 샐린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출판사로 전화를 걸어 욕을 하며 원고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설상가상 영국 내 출판권을 약속한 제이미 해밀턴도 원고를 보고는 염려 섞인 생각을 한다.


샐린저의 첫 번째 장편소설에서는 엄청난 재능이 느껴지고, 이야기 자체도 아주 재미있지만, 미국 청소년의 은어가 영국 독자들에게도 호소력을 가질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해밀턴은 작품은 마음에 들었지만, 출판 사 사장의 입장에서는 위험성이 있어 고민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해밀턴은 자신의 직감을 믿고 출간을 결심했고 그 결과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얻어낼 수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발표되고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샐린저. 그런 그에게 나쁜 소식이 날라오는데 1956년의 일이었다. 그에게 '우선 검토' 계약을 제시했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의 작품을 비판해주던 거스 로브라노가 암으로 사망한 것이었다. <뉴요커>의 편집장이었던 거스 로브라노가 사망하자 편집장 자리를 두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다. 이 자리의 승리자는 카트린느 화이트였는데 샐린저와는 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때 샐린저는 『주이』를 완성하여 발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카트린느 화이트는 『주이』를 거부한다. 표면적으로는 <뉴요커>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라는 이유였지만 내심 잡지의 인기 기고가의 글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편집 권력을 보여주기 위한 포석이었기도 했다.


결국 『주이』를 출간할 길이 사라지자 샐린저는 당황하게 된다. 지금까지 <뉴요커>에만 글을 담았기에 지금에 와서 다른 잡지에 글을 보내기도 어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알력 다툼에 굴하지 않고 작품만을 본 편집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윌리엄 숀이었다. 윌리엄 숀은 근시안적인 편집부 전체를 질책하면서 샐린저의 『주이』를 자신이 직접 편집하겠다고 나섰다. 두 사람은 <뉴요커>가 늘 그랬던 것처럼 끊임없이 회의하며 단어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검토했다. 그런 노력 끝에 샐린저가 진심으로 아꼈던 작품 『주이』가 1957년 발표되게 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샐린저는 자신이 동경하는 <뉴요커>와 그 안에 세 명의 편집자들의 도움을 통해 작품 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자신의 대표작을 짓고, 마지막까지 뚝심 있게 자신의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샐린저 하우스의 입주자들.

샐린저 하우스 첫 번째 입주자는 휘트 버넷으로 선정했다. 본문에서 잠시 이야기 나눈 그는 샐린저의 첫 문학 스승이자 그가 소설 외적으로 외도할 때마다 그를 잡아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샐린저를 무작정 보듬어주지는 않았는데 그의 그런 태도는 샐린저의 자립심을 키워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장편 집필을 끊임없이 권유했던 그가 아니었으면 『호밀밭의 파수꾼』의 집필이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입주자는 케니스 슬라웬스키. 평론가이자 기고가인 슬라웬스키는 샐린저의 관한 광대한 자료조사와 작품 분석, 그리고 끈질긴 인터뷰를 통해 샐린저를 제대로 소개하는 유일한 책 『샐린저 평전』을 펴냈다. 샐린저는 사실 은둔의 작가로 알려졌을 정도로 세상에 나서지 않는 작가였기에 누구도 그의 삶과 이야기를 알기 쉽지 않았다. 다행히 케니스 슬라웬스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에서 멈추지 않고 J.D 샐린저라는 이름으로 그를 명확히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입주자는 작가가 되고자 애쓰는 지망생들을 입주자로 선정했다. 샐린저의 생을 보면 그야말로 거절의 인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의 작품은 단 한 번도 쉽게 출간된 적이 없으며, 심지어 『호밀밭의 파수꾼』조차 부족한 작품이라며 출간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이런 거절의 역사 속에서 샐린저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 한다. 뚝심 있게 자신의 생각을 밀어보기도 하고, 편집자의 요청에 맞춰 수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토록 싫어하던 대중잡지가 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런 변화와 도전을 보여주는 유연한 태도는 작가 지망생들이 배워야 할 태도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상황이 어렵고, 아무도 나를 알아봐 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거기서 멈추지 말고 샐린저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태도를 잊지 않기 위해 입주를 해야 할 것 같다.  




마치며.

지금까지 J.D 샐린저와 <뉴요커>의 세 편집자 이야기를 해보았다. 사실 샐린저의 성공과 오늘 이야기한 모든 일이 <뉴요커>와 편집자의 공이라고 한다면 작가의 노력과 재능이 바래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요커>의 장점을 집중적으로 소개한 이유는 현재 한국 문단에도 이런 매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이다. 다들 신춘문예나 기타 출판사 공모전을 통한 등단제도에 문제가 많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뉴요커>는 그럴듯한 예시를 보여주고 있는데 중요한 포인트는 세 가지다. 하나는 자신들의 잡지가 어떤 색을 지니고 있고,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선정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이는 샐린저의 작품이라고 모두 넙죽 받지 않고 자신들의 색에 맞는 작품만 골라 받는 태도에서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기준에 맞는 작품을 대중의 관심과 어떻게 버무려 전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태도다. 이는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대중들에게 외면받을 작품이라면 반드시 수정과정을 거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마지막 하나는 결국 중요한 것은 작품이라는 우선적인 생각이다. 그들은 새로운 계약방식을 만들면서까지 샐린저를 잡으려 했다. 이것은 회사 차원에서 보면 모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를 통해 <뉴요커>는 샐린저라는 걸출한 작가와 안정된 생활을 바탕으로 펼쳐내는 샐린저의 명작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작가와 작품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생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문학과 문단의 플랫폼을 문제 삼고, 틀을 깨자고만 말하고 있다. 하지만 플랫폼이 어느 것으로 바뀌든, 새로운 틀을 수십 개 새로 가져오든, 중요한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선정 기준과 대중들의 요구와 목소리에 귀를 닫은 방식으로는 나아질 것이 없다는 것이다.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기준 없이 '신선한 작품'만 원하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이 때문에 휘둘리고 있는 작가들과 대중들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도 흔들리는 부표 위에 오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오르고 싶은 배는 흔들림 없는 유람선, 혹은 아름다운 범선, 혹은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같이 위태로워도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오를 수밖에 없는 잭 스패로우의 조각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봐야 할 것 같다.




‘샐린저 하우스 입주자 여러분께.’


우리는 여기서 멈출 것입니다.

아직 울타리도, 잔디밭도, 발코니도 보이지 않겠죠.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멈춰 이곳을 집이라 부를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유명해지면, 내 작품이 많이 팔리면, 내 입이 더욱 커진다면…

이곳에 높은 담을 세우고 큰 창을 내고, 위대한 지붕을 올릴 것이라고.


저는 그러면 그럴수록 낭떠러지에 가까이 다가갔지만

여러분의 계획을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지을 그 집에 문은 활짝 열어두십시오.


낯선 동심이, 순수한 마음이, 맑은 목소리가 끊임없이 내달릴 수 있도록.

그 모든 것에 당신의 집이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여러분의 문을 활짝 열어두십시오.


그리고 가끔,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아이가 있다면.

그런 아이가 있다면 손에 쥔 크리스탈 잔을 던져버리고 손을 뻗으십시오.

위대한 작가가 될 당신이 지켜야 할 것은 그것뿐입니다.




<팟캐스트 '책 읽는 라디오' 2015 가을 개편>

'작가를 짓다' 9화   

(방송 듣기)

https://goo.gl/N9YKFK


<참고자료>

『샐린저 평전』 민음사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프레니와 주이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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