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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Nov 12. 2015

로맹가리와 새벽의 약속, 니나 카체프

작가를 짓다 - 11화

소설가가 유일하게 창조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이름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부모에게 처음 선물 받은 그 이름 덕분에 소설가는 완벽한 창조주가 되지 못한다. 그런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끝도 없이 자신의 이름 뒤에 새로운 이름을 덧붙인 작가가 있다. 자신이 선물 받은 이름으로 작가가 되었고, 자신이 창조한 이름으로 작가의 시간을 엮었던 작가. 오늘 소개할 작가는 로맹 가리. 그리고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살아간 그의 이야기다. 


로맹 가리는 19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다. 그의 어머니는 니나라는 이름의 연극배우였다. 니나는 리투아니아계 유대인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미모와 끼, 그리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재능을 놓치지 않은 니나는 16살 때, 연극배우가 되겠다며 집을 나선다. 처음부터 모스크바의 대극장에 설 수는 없었던 니나는 유랑극단에 입단한다. 이곳저곳을 돌며 연극을 배우던 중 니나는 한 남자를 만나는데 그가 바로 로맹의 아버지였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니나는 임신을 해 로맹을 낳는다. 하지만 로맹의 아버지는 니나와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하자 두 사람을 버리고 떠나게 된다. 


성만 남기고 떠난 남편 때문에 니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녀는 단역이라도 돈을 벌 수 있다면 무대에 올랐고, 무대에 서지 않는 시간에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렇게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던 중 1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자 그녀는 모스크바를 떠나 ‘빌나’로 향하게 된다.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참담했는지는 정확히 기록에 나와 있지 않지만 로맹은 그 시절을 상당히 증오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로맹은 자신의 이력서에 언제나 자신의 출생을 ‘빌나’라고 적었다. 


빌나에서의 생활 역시 순탄하지는 못했다. 번듯한 직장을 잡기도 어려웠던 상황이라 니나는 온갖 잡일을 하며 로맹을 보살폈다. 로맹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됐음에도 가정 형편 때문에 로맹은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게다가 유대인이 인종차별을 받고 있던 시기였기에 섣불리 아무 학교나 보낼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니나는 스스로 로맹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니나는 로맹에게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쳤는데 그중에서 프랑스어는 특히 강조하였다. 그녀는 프랑스에 깊은 동경을 갖고 있어서 로맹과 자신이 언젠가는 프랑스에 정착하길 바랐다. 그래서 니나는 로맹에게 프랑스 국가를 외우게도 했고,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시를 읽히기도 했다. 이때부터 니나의 유일한 목표는 로맹을 상류사회의 일원이자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남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니나는 아들에게 모든 기회를 제공하려 애썼고, 직접 사교계의 춤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로맹을 준비시켰다. 


이렇게 아들을 교육하고, 생계도 꾸려 나가야 했던 니나는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굉장히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니나는 로맹에게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봐주렴.” 하고 청했다. 로맹은 어머니의 말에 따라 하늘을 쳐다봤고 그럴 때면 로맹의 파란 눈빛이 니나의 눈에 들어왔다. 니나는 그 눈을 보며 용기와 새로운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어머니의 행동 때문에 로맹은 어린 시절 자신의 눈빛 속에 약간의 마법과 많은 연금술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 



니나는 빌나에서도 빚 독촉에 시달리고 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폴란드 바르샤바로 향한다. 물론 바르샤바에서도 가난이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고 니나는 담배 마는 일까지 했다. 로맹은 바르샤바에서도 정규 학교에는 돈이 부족해 가지 못하고 대신 김나지움이라는 교육기관에 들어가게 된다. 니나는 자신은 식사를 굶을지언정 로맹의 배는 항상 부르게 채워주었다. 그녀는 로맹이 학교에 갈 때면 책가방에 빵과 초콜릿을 매일 넣어주었고, 로맹에게 만큼은 언제나 고기를 주었는데 덕분에 로맹은 어린 시절 내내 한 번도 배고픔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바르샤바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이번에는 동경해 마지않던 프랑스 니스로 이주한다. 니스에서 몇 달 동안은 여전히 잡일을 하며 지내야 했다. 그녀는 다른 집의 개나 고양이를 씻기는 일을 해야 했을 정도였는데 다행히 두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이 찾아온다. 두 사람을 좋게 본 호텔 ‘메르몽’의 주인이 두 사람을 크게 도와주었는데 니나는 주인 덕분에 호텔 관리일을 정규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니나의 몸 상태는 크게 악화되고 있었는데 당뇨가 특히 심했다. 그래서 그녀는 수차례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외출할 때마다 망토 안쪽에 “저는 당뇨 환자입니다. 실신한 저를 발견하시면 제 가방 속에 있는 봉지 설탕을 먹여 주십시오. 감사합니다.”라고 쪽지를 적어 다녔을 정도라고 한다. 


이런 자신의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니나는 여전히 로맹을 위해서만 살아갔다. 그녀는 로맹의 교육을 위해 아낌없는 노력과 지나칠 정도의 투자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로맹이 조금이라도 관심이나 재능을 보이는 분야가 있으면 무조건 “너는 그 분야의 천재!” 라며 로맹을 격려해주었다. 물론 격려에서 멈출 니나가 아니었기에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일화도 있었는데 이야기는 이렇다. 한번은 테니스를 배우고 싶었던 로맹이 친구에게 라켓을 선물 받는다. 하지만 테니스 클럽의 비싼 입회비를 낼 능력이 없던 로맹은 테니스를 할 수 없었다. 이를 본 니나는 당장 유명한 테니스 클럽을 찾아가 회장에게 떼를 쓰기 시작했다. 회장은 막무가내인 니나를 무시했다. 어쩔 수 없어진 니나는 테니스 클럽의 회원이자 스웨덴의 왕이었던 구스타프 5세에게 매달렸다. 니나는 구스타프 5세에게 “로맹은 장차 프랑스 테니스 챔피언 감이다.”라고 소개하며 로맹을 도와달라 청한다. 구스타프 5세는 황당했지만 그녀의 말을 믿고 자신의 코치와 볼을 주고받아 보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 막 라켓을 잡은 로맹의 실력이 좋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로맹은 망신만 당하고 만다. 


이대로 상황이 끝날 것 같았지만 구스타프 5세는 니나의 정성에 감복했는지 회장에게 로맹의 입회비를 자신이 대신 내겠다며 선처를 베풀어 주었다. 그러자 니나는 로맹의 형편없는 실력은 이미 잊었는지 “그럼 그렇지. 내 아들이 누군데!”라며 우쭐하면서 아들을 격려했다. 하지만 로맹 스스로는 이미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기 때문에 곧장 클럽을 뛰쳐나가고는 다시는 클럽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사실 니나의 이런 일화는 매우 많았다. 그녀는 로맹을 보며 항상 “넌 외교관이 될 거고, 프랑스 대사가 될 거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거야.” 라며 로맹에게 세뇌 아닌 세뇌를 시켰다. 사실 이때만해도 프랑스의 정식 국민도 아니었던 로맹이 프랑스 대사가 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로맹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말을 한 번도 무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허황된 말을 사실로 바꾸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덕분에 로맹은 공부를 잘했는데 특히 언어 쪽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모습에 니나는 언제나 아낌없는 격려와 칭찬을 쏟아 주었는데 로맹은 훗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로맹이 표현한 대로 니나는 로맹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을 주었다. 로맹도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자신의 어머니를 쉴 새 없이 일하게 하는 세상에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동시에 그런 어머니를 도와주고 싶지만, 아직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런 좌절감을 로맹은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으로 갚아보려 애썼는데 그 결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로맹은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해 법학을 전공하게 된다. 니스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법과 대학에 등록한 로맹은 처음으로 니나와 떨어져 지내야 했다. 로맹이 자취생활을 하자 니나는 아니나다를까 그의 월세방에 소시지, 계란 치즈 같은 음식을 끊이지 않고 보내주었다. 


로맹은 법과대 공부를 하면서도 어머니를 위해 작품 집필을 하기 시작했다. 로맹이 학생 시절 습작으로 쓰던 작품을 니나에게 보여줬을 때 니나가 로맹에게 한 말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넌 빅토르 위고가 될 거야. 노벨상을 탈 거야.”


니나는 로맹의 언어적 재능, 작가적 재능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었고 로맹 역시 어머니를 위해 법학을 전공했지만, 창작욕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로맹 이어도 처음부터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다. 로맹은 자신의 작품을 계속해서 투고했지만, 거절을 당한다. 그럴 때마다 로맹은 어머니에게 실망을 끼쳐드리기 싫어서 문학 주간지 <그랭구아르>에 담긴 다른 이의 소설을 자신이 필명으로 발표한 글이라며 어머니에게 보낸다. 니나는 로맹의 거짓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작품을 보며 즐거워했다. 


그러다 1935년. 드디어 <그랭구아르>에 단편 <소나기>가 당선되며 당당히 로맹의 이름이 실린다. 니나는 시장 상인들에게 <그랭구아르>를 뿌리며 자랑을 했고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낭독을 해주기도 했다. 이때 로맹은 1,000프랑의 원고료를 받았고 그것을 모두 니나에게 주었다. 니나는 그중 250프랑을 다시 로맹에게 생활비로 보내주었다. 


로맹의 다음 스텝은 명예로운 군인이었다. 그는 24살 나이에 공군 장교 양성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유 프랑스 공군에 입대하게 된다. 이때 로맹 가리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군사적 활약을 펼친다. 로맹으로 하여금 힘든 전쟁을 버티게 해준 것은 존경하는 드골 장군의 명령도 아니었고, 프랑스의 자유도 아니었다. 로맹에게 힘을 준 것은 다름 아닌 니나의 편지였다. 니나는 로맹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내주었고 로맹은 자신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절대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으려 애썼다. 

이렇게 전장에서의 시간을 마친 로맹 가리는 1944년 프랑스 임시정부로부터 해방 무공훈장을 받는다. 그리고 같은 해, 전쟁 중에 쓰기 시작했고 훗날 그의 첫 번째 출세작이 되는 『유럽의 교육』을 출간하게 된다. 다음 해인 1945년에는 자신이 존경하던 드골 장군이 개선문 아래에서 로맹의 가슴에 직접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달아준다. 결국, 로맹은 어린 시절, 삶의 여명이 올라오던 새벽에 나누었던 그 약속을 모두 지켜낸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니나에게 정식 프랑스인이 된 자신의 모습, 해방 무공훈장을 받은 자신의 모습,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가슴에 단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이 남아있었다. 로맹은 니나가 있는 니스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어머니 대신 몇 권의 공책만 남아 있었다. 


시간을 조금 돌려보자. 로맹 가리가 전장에 있던 2년 전, 니나는 암으로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니나는 암에 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자 아들에게 보낼 편지를 250통이 넘게 미리 써놓았다. 그리고 아들이 자신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지 않게 하려고 친구에게 주기적으로 자신이 남긴 편지를 한 통씩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다. 덕분에 로맹은 전쟁터에서 계속해서 어머니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고 그 편지에 힘을 얻어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로맹 가리는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니나에게 보여주지 못한 채, 니스의 코카드 묘지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으로 향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색의 꽃 ‘백합’에 자신의 모든 성공을 담아 바친다. 



PS.

니나가 보낸 편지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로맹 가리의 자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에 나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 로맹이 창작한 이야기다. 실제로 니나가 로맹에게 보낸 편지는 한 통뿐이었고, 니나는 병상에 누워 자신의 노트에 로맹을 생각하는 마음을 한 장, 한 장 남겼다고 한다. 로맹이 니스로 돌아왔을 때 마주한 것도 어머니의 노트가 전부였다. 


자, 그렇다면 두 이야기 중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시는가? 

어떤 쪽을 선택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250여 통의 편지, 몇 권의 노트. 그것은 모습이 다를 뿐 니나가 아들 로맹에게 전했던 사랑이 달라지진 않으니까 말이다. 




가리 하우스의 입주자들. 

첫 번째 입주자는 로맹 가리의 사랑 중 한 명이었던 진 세버그. 사실 로맹 가리는 여성편력이 있었던 편이어서 그의 생에 꽤 많은 여성이 함께했다. 그중에서도 진 세버그와의 만남은 세기의 로맨스로 불리며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는 24년의 나이 차가 있었고, 진 세버그는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를 통해 큰 인기를 끈 배우였다. 진 세버그의 매력을 나열하자면 수도 없겠지만 로맹 가리가 진 세버그에게 느꼈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로맹 자신이 돌볼 수 있고, 돌봐줘야만 하는 여자였다는 점이었다. 로맹은 언제나 자신이 돌봐줄 수 있는 존재를 찾고 있었는데 그것에 정확히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진 세버그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로맹은 항상 진 세버그를 보호자의 눈빛을 돌봐주었다. 그녀가 계속된 영화 실패로 하락세에 접어들어 힘들어할 땐 그녀의 의욕을 되살려주고자 직접 <킬>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로맹 가리는 끝까지 그녀를 돌보지는 못하고 헤어지고 만다. 그리고 진세버그는 마흔하나의 나이에 공식적으로는 약물중독에 의해 사망을 하게 된다. 진 세버그가 사망하자 로맹 가리는 기자회견에서 그녀를 FBI가 죽였다며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녀의 죽음에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진 세버그가 죽은 1년 뒤,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와는 관계없는 일이다.”라고 말을 남긴 채 권총 자살로 세상을 떠난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듯 정말 많은 이야기와 음모론이 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진짜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로맹이 진 세버그를 지켜주고 싶어 했다는 마음만은 진실로 보인다. 그래서 로맹 가리가 다시 한 번 진세버그를 돌봐주길 바라며 입주자로 선정해보았다. 



두 번째 입주자는 고양이다. ‘작가를 짓다’ 최초의 동물 입주자인데 로맹 가리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아이에게는 사랑할 누군가를 줘야 해. 비행 청소년이란 개도 고양이도 없는 아이들이야.” 이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로맹은 사람에겐 자신의 사랑을 전달할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전에 니나에게는 로맹이 그런 고양이였을 것이고, 로맹에게는 진세버그가 그런 고양이였을 것이다. 니나와 진세버그를 먼저 떠나보낸 로맹에게도 그런 존재가 필요할 것 같아서 고양이를 입주자로 결정해보았다. 




마치며. 

지금까지 로맹 가리와 그의 어머니 니나의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로맹 가리의 이야기를 찾으며 문득 어머니와 했던 대화가 생각났다. 


어느 날, 집에서 글을 쓰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잘되고 있니?” 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몰랐으니 잘되냐는 말 앞에 구체적인 무언가를 붙이지 못하신 것 같았다. 나는 “만날 그렇지 뭐.”라고 성의 없게 대답을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뭐 그리 힘든걸 하려고 그러냐며 걱정 섞인 말을 건넸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말에 괜히 미안한 감정이 올라왔다. 미안하면 미안하다 말하면 될 텐데 민망한 마음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게 왜 글 쓰는 재주를 줘서….” 


어머니와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고 나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재주에 관해 생각했다. ‘내가 지금 쓰는 모든 글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준 그 재주로 쓰인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놈의 재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 아직도 어머니가 내 걱정이나 하게 하는구나.’ 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로맹 가리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니나의 거친 기대와 희망을 부담으로 느끼는 대신, 일찍 성공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로맹은 니나와 했던 새벽의 약속을 지키려 전쟁 속에서도 글을 쓰며 어머니의 마음에 다가가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로맹 가리의 마음을 떠올리며 그의 작품들, 특히 그의 자전적 작품 『새벽의 약속』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해 드린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 각자에게 어쨌든 쓸만한 재주를 남겨주신 분들을 떠올려 보시는 것도 추천해 드린다. 





‘가리 하우스 입주자 여러분께.’


당신이 했던 최초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인사를 잘하겠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겠다, 

일찍 집에 돌아오겠다,  

… 당신을 사랑하겠다.


어떤 약속으로 생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셨습니까? 


내가 했던 최초의 약속은 멍처럼 짙은 새벽의 하늘 아래서였습니다. 

그 하늘 아래 잠이 덜 깬 내 눈꺼풀은 몸보다 무거웠습니다. 

귓가에는 참새 수십 마리가 지나간 듯 높은 새소리가 울렸고,

배를 덮은 이불은 더없이 따뜻했습니다. 


현실보다는 꿈에 가까웠던 새벽의 시간. 

두 눈 사이로 어렴풋이 낡은 잿빛 코트를 입은 여자를 봤습니다.

그녀는 누가 깨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그녀가 연 문 밖의 공기는 치유되지 못한 상처처럼 여전히 짙고 파랬습니다. 

여자는 푸른 어둠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엔 이불 속 아주 작은 몸을 가진 내가 있었습니다. 


“엄마 어디가…?”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찬바람을 지우려 어둠을 향했고, 

조용히 문은 닫혔습니다.


그것이 내가 했던 최초의 약속입니다.

당신이 했던 최초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팟캐스트 '책 읽는 라디오' 2015 가을 개편>

'작가를 짓다' 11화   

(방송 듣기) 

https://goo.gl/c9tZ8T


<참고자료>

『로맹가리』 한길사

『숨가쁜 사랑』 실천문학사

『새벽의 약속』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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