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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Apr 15. 2024

기억해


 인간은 망각합니다. 망각은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발명한 진화의 선물입니다. 어쩌면 인류는 수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좋은 일만 있지는 않다는걸. 필연적으로 우리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견디기 힘든 일을 마주하며,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을 겪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망각합니다. 마음 한편에 튼튼한 자물쇠가 달린 금고를 두고, 그 안에 잊고 싶은 기억을 차곡차곡 넣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 그 금고를 열지 않은 채 세상을 살아 갑니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기에, 종종 자물쇠가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하며 하루 또 하루를 살아 냅니다.


 다만, 마음의 자물쇠는 그리 단단하지 않아 빗장이 열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진화의 선물을 사용해 봅니다. 눈물과 커다란 울음. 그것입니다. 기능으로만 본다면 눈에 들어온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흐르는 것일진대, 눈물은 그것 외에도 많은 것을 씻어 줍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이들. 이제는 마주할 수 없는 존재, 아른거리지만 잡을 수 없는 것들. 그래서 슬픈 것들. 그래서 크게 소리쳐 울어야 겨우 진정이 되는 시간들. 그런 기억에 짓눌리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줍니다.


 한바탕 크게 울고 쉼 없이 눈물을 흘리면 조금은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속 금고를 찾아갑니다. 망가진 자물쇠는 멀리 치우고, 그 안에 든 기억을 하나씩 다시 손길 주어 만지고, 느끼고, 껴안고, 다시 흐느끼고... 한참을 그러다 다시 기억의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또 한 해를 버텨줄 자물쇠를 걸어 둡니다. 그리고 안녕. 인사합니다.


 기억의 자리를 나서니 어느덧 봄입니다. 벚꽃은 언제 폈는지 어느새 지고 있습니다. 그 아래로 상처 난 자리가 아물 듯 연한 새잎이 돋습니다. 그 잎을 가만히 만져 봅니다. 또 가슴 위로 두 손을 얹어 봅니다. 그러자 봄바람이 그사이를 돌아 나섭니다. 이제 딱 그만큼만 흔들리려 합니다. 새잎같이 딱 그만큼만 흔들릴까 합니다. “아직 그 정도는 괜찮잖아.” 마음에 물어봅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듯 또 한 번 바람이 불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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