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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May 23. 2024

여행하다 죽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2. 에든버러

여행하다 죽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우리는 지금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움직이는 기차가 아닌, 고장으로 네시간이나 멈춰 있는 기차에 있다는 사실이죠.

만약 당신이라면. 어느 시골길에 네 시간이나 기차가 멈춰 있다면.

그 안에서 무엇을 하실 것 같으신가요?


긴 기차여행의 지루함을 태블릿에 담아온 영화나 드라마로 이기려 할 수도 있고,

다음 여행의 체력을 위해 잠을 청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당신이 몽상가라면, 어쩌면 이런 생각에 깊이 빠져들 수도 있을 거예요.

예를 들면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라다가 우연히 마법사 학교에 가게 된 소년이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


지금 저 앞자리에 탄 저 사람처럼 말이에요.



기차 안에 함께 탄 몽상가. 그의 이름은 조앤 롤링입니다. 포르투갈에서의 결혼 생활에 실패하고, 어린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조앤 롤링. 그는 우연히 멈춰버린 기차 안에서 이런 재밌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상은 곧 현실에 등장하게 되는데요. 훗날 <해리포터>로 불릴 모든 이야기는 시골의 어느 기찻길에서 시작해 킹스크로스역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이어집니다.


킹스크로스역의 8번 승강장. 이곳에 가면 가상의 출입구 9와 4분의 3 승강장이 있습니다. 벽 속으로 움푹 들어간 구조물로 만들어진 이 특별한 출입구는 소설 <해리포터> 속 마법사들이 그들의 학교 호그와트를 향할 때 사용하는 곳과 동일한 위치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물론 "호그와트 못 가니까 돌진하지 마세요"라는 안내문처럼 아무리 그 벽을 통과하려 해도 소설 속 마법사들처럼 호그와트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습니다. 물론 그건 우리가 머글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이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다른 곳을 향하는 기차를 타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행 열차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그 열차에 오르도록 해요. 그 열차가 호그와트로 가는 가장 빠른 기차일 테니까 말이죠.



에든버러. 남으로는 영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북으로는 북해를 마주하는 이곳은 지리적 특성상 숱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 증거는 에든버러성의 상흔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요. 성의 상처가 깊은 만큼, 에든버러 사람들은 숱하게 전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에든버러에서는 유독 유령이나 귀신 이야기를 쉽게 마주할 수 있는데요. 유령 투어를 원한다면 이곳 에든버러만큼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도시의 분위기 역시 이런 스산함을 반영하고 있는데요. 중세의 도시에 온 듯한 낡고 오래된 건물과 거리가 이런 분위기를 더 깊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날씨 또한 이런 분위기를 한결 더 돋보이게 하는데요. 겨울이라면 비가 오지 않는 날을 찾는 것이 더 어렵고, 여름의 맑은 날이라 하더라도 언제 비가 쏟아질지 알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 에든버러입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우산을, 최소한 깃을 세울 수 있는 코트 정도는 입어두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럼 지금부터는 에든버러를 걷는 이방인의 복장을 갖추고 거리를 걸어보도록 하죠.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은 몸을 따뜻하게 데워 줄 카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에든버러의 스산함과 습기, 그리고 온도보다 낮은 바람의 무게에 적응하지 못했으니까 말이죠. 다행히 에든버러에서 카페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어렵지 않게 몇몇 카페를 발견하셨을 거예요. 그중에서 당신께 가장 추천하고 싶은 카페는 이곳이에요. 카페 엘리펀트 하우스' 말이에요.


빨간 외관과 꾸밈없는 폰트로 새겨진 가게 이름. 그 안으로 들어서면 웅성이는 사람들 때문에 지인과 왔다고 한들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쉽지 않음을 알게 되실 거예요. 하지만 이런 백색소음이야말로 생각을 정리하는데 좋은 도구가 되어주는데요. 그래서일까요? 기차에서 만났던 몽상가. 조앤 롤링은 작은 테이블에 앉아 쉴 새 없이 타자를 치고 있습니다. 다행히 유모차에 누워있는 아이는 엄마의 집필을 위해 눈치 빠르게 잠든 것으로 보이죠?


조앤 롤링은 맨체스터와 런던에서 구상한 작품을 이 카페에 앉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국가로부터 최소 생계비를 지원받아야 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던 그에게 있어 집필 활동은 성공을 보장해 주지 않는 복권 같은 것이었죠. 그럼에도 그는 썼습니다. 쓰고 또 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해리포터 - 마법사의 돌>을 완성해 냈죠. 아동문학으로 보기에 지나치게 긴 분량 때문에 처음 이 작품을 출간하겠다 나선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겨우겨우 아주 작은 규모의 출판사였던 블룸즈버리를 통해 초판 5백 부의 계약을 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물론 그 5백 부는 <해리포터> 속 부엉이가 배달이라도 했는지 스코틀랜드를, 영국을, 미국을,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는데요. 자기 작품이 이토록 성공할 줄은 상상력 가득한 조앤 롤링조차 떠올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카페 테이블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에게 귀띔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선물 상자를 여는 몫은 본인에게 남겨두기로 하고, 저희는 조금 더 에든버러 여행을 해보도록 해요.



이번에 떠날 곳은 조앤 롤링의 산책길 중 하나인데요. 그곳의 끝에는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묘지를 일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는 한국과 달리 유럽의 묘지는 생활공간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만큼 이들은 죽음을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공동묘지에도 조앤 롤링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가볍게 산책하곤 했는데요. <해리 포터>가 출간된 이후, 이 묘지는 세상에서 가장 북적이는 묘지 중 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해리 포터>의 최종 빌런. 볼드모트의 묘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죠. 상상의 작품 속 빌런의 진짜 묘가 있다? 언뜻 들으면 잘 이해되지 않을 거예요.


조앤 롤링은 자신의 작품에 주변 지인의 이름, 거리의 이름 같이 현실에 존재하는 이름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해리 포터>라는 상상의 작품에 핍진성을 부여하기도 했는데요. 조앤 롤링의 산책 코스였던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공동묘지'의 주인들도 작가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조앤 롤링은 1802년 트리니다드에서 스물세 살 나이로 사망한 토마스 리들의 무덤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세계가 두려워하는 마법사에게 부여했죠. 이외에도 윌리엄 맥고나걸, 로버트 포터, 엘리자베스 무디, 마가릿 루이자 스크림저 웨더번 같은 이름을 이곳 공동묘지에서 가져왔습니다. 그런 이유로 <해리 포터>의 팬들은 이곳을 현실 속 호그와트라 생각하며 산책하고, 각각의 무덤을 찾는 여행을 하곤 하는데요. 당신은 누구의 묘를 가장 먼저 찾고 싶으신가요?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공동묘지에서 해리포터의 인물들을 만났다면 이제는 묘지 너머로 보이는 '조지해리엇스쿨'에도 시선을 두면 좋을 거예요. 이 오래된 학교는 네 개의 집과 네 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고딕 양식의 학교입니다. 네 개의 탑이 서 있는 학교라는 말만 들어도 <해리포터> 속 마법학교 호그와트를 떠올리는 분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실제로 조앤 롤링은 이 학교를 보며 호그와트를 그렸다고 하죠. 그런 이유로 이곳 역시 <해리포터> 팬들에게 놓쳐선 안 될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는데요. 자, 여기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고 가도록 해요.


네? 안 들어갈 거냐고요? 아시잖아요. 호그와트는 "머글 출입 금지"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우리는 아쉽지만, 이 학교에 들어가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멀리서 어린 해리가 그랬던 것처럼. 저 멀리 학교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펼쳐진 수많은 모험의 순간들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해요. 그래도 아쉬우시다면…. 좋아요. 따라오세요! 아마도 당신이 가장 좋아할 여행지가 아직 남아있으니까요.



에든버러의 빅토리아 스트리트. 이곳에는 <해리포터>에서 주인공들이 지팡이를 사며 쇼핑을 즐겼던 거리. 다이애건앨리의 모델이 된 거리가 주욱 이어져 있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조앤 롤링은 이 거리를 모델 삼아 작품에 녹여냈는데요, 작품이 유명해지자 이 거리가 작품을 모델 삼아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거리의 가게들은 저마다 해리포터의 분위기를 껴안은 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죠. 그중에서도 지팡이를 직접 살 수 있는 'Museum Context'는 놓쳐선 안 될 가게일 텐데요. 이곳의 꼭대기 층에는 '다이애건앨리'로 갈 수 있다는 문을 만들어 두기도 했으니까요, 혹시 자신에게 마법의 피가 흐른다고 믿는 분들이 계시다면 조심스레 그 문을 열어보는 것도 추천해 드려 볼게요. 마법은 언제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오늘은 이렇게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새겨져 있는 <해리포터>의 흔적들을 따라 여행을 해봤는데요.

스산하게만 느껴졌던 도시의 색감이 한결 부드럽고 다채롭게 보이지 않으시는가요?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한 작가의 상상력이 뿌려놓은 마법 물감의 덕일 수도 있고,

잠깐의 여행으로 일상을 마법으로 만들 줄 아는 당신의 능력 때문일 수도 있을 거예요.


이 마법 같은 시간은 다음번에도 이어질 테니까요.

우리는 다음 여행 때 다시 만나도록 해요.


그때까지.

잘 지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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