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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May 30. 2024

여행하다 죽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3. 톨레도


이 그림은 대체 뭘까요? 캔버스의 중앙에는 붉은 옷의 그리스도가 있고 남은 공간은 군인과 군중들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와 같은 위치에 있기라도 한다는 듯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심지어 그의 옷을 벗기려 하고 있네요. 게다가 색채감 넘치는 그리스도와 달리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캄캄한 어둠으로 표현되어 있어요. 그래서 마치 어둠 속으로 그리스도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데요.

이런 그림이 어떻게 톨레도 대성당에 걸릴 수 있었던 걸까요?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아마도 대단한 혁명가.

아니면…. 미치광이였던 걸까요?



1579년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이 작품의 화가는 엘 그레코입니다.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그는 세상을 떠돌며 그림을 배우고, 스페인 톨레도에서 정착했죠. 그런 그가 처음 받은 의뢰는 톨레도 대성당에 걸릴 그림이었습니다.


당시 화가들이 먹고사는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교회나 왕가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었어요. 엘 그레코도 예외는 아니었죠. 그렇기에 교회가 건넨 이 의뢰를 잘 해내야만 톨레도에서의 새로운 삶을 안정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는데요. 문제는 엘 그레코가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천성을 가졌다는 점이에요. 그는 캔버스에 그리스도의 권능을 표현하는 대신, 자기 상상력과 해석을 더해 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이 작품은 전혀 문제가 없어요. 상상력도 과하다 말하기 어렵고, 되려 모범적으로 성경의 장면을 표현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죠.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특히 성직자의 눈에는 이 그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교회의 권위나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말이에요.

물론 엘 그레코도 이 작품이 그들의 성에 차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상상과 생각이 담기지 못하는 작품을 그릴 방법은 도무지 알지 못했다고 해요. 여느 몽상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결국 엘 그레코는 교회와도 사이가 어긋나고, 왕가에서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끝까지 톨레도에 머물며 자신만의 작품활동을 해나갔는데요. 그런 엘 그레코의 기운이 강하게 남아있던 탓일까요? 얼마 후, 톨레도에서는 또 하나의 몽상가가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키하다 인지 게사다인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해요. 대신 이 이름만은 세상 모든 이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죠.


돈키호테라는 지구 최고 몽상가의 이름을 말이에요.



돈키호테 스러운...스페인 톨레도. 마드리드에서 한 시간 정도 차를 몰면 도착할 수 있는 이곳은 삼면이 타구스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전략가라 할지라도 이곳을 함락시킬 방법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데요. 덕분에 톨레도는 예로부터 정복자의 상징이자, 가장 힘 있는 자들만이 차지할 수 있는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한때는 서고트 왕국이, 한때는 이슬람 왕국이, 또 한때는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던 톨레도. 그런 곳이기에 톨레도는 도시 전체가 서유럽의 역사를 담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에요. 실제로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중세로 시간을 달린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곳은 정복자의 피부와 언어가 때마다 바뀌는 곳이었기에, 다양한 이방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기도 해요. 그래서 우리 같은 여행자들의 발길을 마다하지 않는데요. 그중에서도 우릴 반기는 인물이 있다면 그건 바로 라만차의 늙은 기사 양반. 돈키호테입니다.


중세의 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톨레도의 구시가지 입구. 그곳에는 한 권의 책을 들고 있는 작가, 세르반테스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가 손에 든 책은 아마도 <돈키호테>일 텐데요. 이 책의 원제를 풀어보면 "라만차의 재치 있는 이달고, 돈키호테"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라만차 지역의 중심이 바로 이곳 톨레도인데요. 그렇기에 톨레도에서는 이 재치 넘치는 기사 양반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안내를 받으며 구시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대장간이에요. 물론 진짜 과거의 대장간 모습을 재현한 것은 아니지만, 중세의 기사들이라면 문이 닳도록 드나들었을 만큼 멋진 검과 갑옷, 철로 된 장식품을 파는 가게들이 수없이 있습니다. 실제 톨레도는 과거부터 철제 무기를 만드는 데는 따라올 곳이 없을 정도로 능력 있는 대장장이가 즐비했던 도시입니다. 그래서 톨레도의 갑옷과 검, 그리고 창을 가져야만 진정한 기사라 말할 수 있을 정도였죠. 그 명성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데요. 물론 검과 창의 시대가 저문 지는 너무 오래되었기에, 지금은 장식용 무기나 영화 소품용 무기들을 주로 만든다고 해요. 우리가 잘 아는 <반지의 제왕> 속 무기들도 이곳에서 많이 제작되었다고 하니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영화 속에서 사용된 검과 갑옷을 만나는 행운을 얻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어쩌면 돈키호테의 모험에 사용된 창도 이곳이라면 만나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밤마다 살피콘 요리, 튀긴 돼지고기 요리, 달걀 프라이, 완두콩 요리, 비둘기 요리를 먹어대며 재산의 4분의 3을 사용하는 우리의 기사 양반 돈키호테도 아마 이곳에서 만들어진 창과 갑옷으로 모험을 시작했을 거예요. 수많은 기사 소설을 섭렵한 끝에, 현실과 허구를 혼동한 몽상가 돈키호테. 그런 그에게 풍차로, 그리고 세상으로 돌진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도 어쩌면 톨레도 장인들의 창과 갑옷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가요? 당장 실력 있는 대장장이의 가게로 들어가 미니어처 창과 갑옷이라도 사고 싶지 않으신가요? 돈키호테도 우리도 세상에 돌진해야 하는 운명인 것은 마찬가지니까 말이에요.


만약 마음에 드는 창과 갑옷을 고르셨다면, 이제 골목길을 헤맬 차례입니다. 톨레도에는 200개도 넘는 골목길이 어지럽게 이어져 있어요. 심지어 그 골목길 끝에서 막다른 길을 마주할 때도 있고, 내리막길을 간다고 생각하고 걷더라도 이상하게 높은 곳에 도착해있거나 반대의 경험을 할 때도 많죠. 그렇기에 이곳에서 원하는 길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대신 이곳에서는 돈키호테식의 여행법을 배워보는 것을 추천해 드려볼까 해요. 그게 어떤 거냐고요? 예를 들면 이렇게…. 지도는 구겨서 버리고, 영예로운 기사에 해당하는 몽상의 목표 하나만을 머릿속에 담은 채, 무작정 헤매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톨레도는 거짓말처럼 당신을 원하는 목적지로 안내해 줄 거예요.


그 걸음 사이에 우리는 엘 그레코의 그림이 있는 톨레도 대성당에 도착할 수도 있고, 톨레도와 외부를 연결하는 오래된 다리 산마르틴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인들이 지은 유서 깊은 알칸타라 다리 앞에서 건널지 말지를 고민하게 될 수도 있죠. 그렇게 톨레도 구시가의 모험을 이어가다 보면 우리는 황제의 언덕에 오르게 될 것이고, 그 끝에서 꿈꾼 자들만이 차지할 수 있었던 고성을 마주하게 되는데요. 14세기에 지어져 지금은 호텔로 사용되고 있는, 톨레도의 정복자들이 머물던 그곳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죠.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고풍스러운 내부 인테리어가 제자리에서 몇 바퀴를 돌며 주위를 둘러보게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너무 시간을 쓰진 마세요. 우리가 차지할 전리품은 이게 다가 아니니까요. 걸음을 옮겨 몸을 누일 방문을 열면 눈앞으로 우리가 골목을 헤매며 걸어 올라온 그곳. 톨레도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직접 발 디뎌 오른 그곳이 눈 앞에 펼쳐질 때. 그 모험의 전리품이 그렇게 내 눈에 담길 때, 우리는 마침내 몽상가에서 승리자의 모습이 되는데요. 돈키호테는 어땠을까요? 그 기사 양반은 이런 승리의 전리품을 얻은 채,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그 이야기는 몹시 슬프고 또 길어질 수도 있으니, 일단은 모험으로 주린 배를 채워줄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향해보죠. 돈키호테처럼 말이에요.

"만약 거리에서 난데없이 웃는 자가 있다면 미치광이거나 <돈키호테>를 읽는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첫 권이 발매되고 스페인에서는 이런 농담이 있었다고 해요. 그만큼 <돈키호테>는 당대 최고의 오락이자 사람들의 배꼽을 빠지게 할 정도로 코믹한 작품이었죠. 그 웃음의 대부분 지분은 역시나 돈키호테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소설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 채, 모험을 떠나는 순간부터, 산초와 함께 벌인 얼토당토않은 모험의 기록들. 그 우스꽝스러운 몽상가의 행동에 당시 사람들은 묘한 재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재미의 끝은 돈키호테가 마침내 제정신을 차렸을 때 끝나버리고 말죠. 미쳤을 때는 모험을 길을, 제정신일 때는 죽음의 길을 걸어야 했던 돈키호테. 라 마차의 기사 양반은 그렇게 몽상을 끝낼 즈음 삶의 마무리를 하게 됩니다. 그 모습은 1권의 성공에 힘입어 오랜 숙고 끝에 나온 2권에의 끝자락에 등장하는데요. 그 장면을 거리에서 읽은 스페인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아마도 미치광이처럼 웃다가 울다가. 또 웃다가 또 울다가…. 그러지 않았을까요?


이제부터 먹을 음식은 그런 돈키호테를 위한 만찬입니다. 호텔의 레스토랑. 그곳에서 우리는 라만차 지역의 전통식을 주문할 거예요. 시작은 톨레도식 메추라기 스튜 '페르디즈 에스토파다'로 해보도록 하죠. 명심할 것은 이건 겨우 첫 번째 음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식비로 재산의 4분의 3을 쓰는 돈키호테를 위한 만찬이기에 이 식사 자리는 꽤 오래 이어질 거예요. 하지만 밤새 이어진들 문제는 없어요. 레스토랑 밖으로 보이는 톨레도의 전경. 그것은 밤이 되면 될수록 더 깊고 은은하게 흐르니까 말이에요. 자신을 감싸는 타구스강의 물줄기처럼 말이에요.



그럼 이 흥겨운 식사 자리와 함께 <돈키호테>가 태어난 라만차의 톨레도 여행은 마쳐보도록 할게요.

남은 시간은 못다 한 돈키호테의 모험 이야기에 양보하도록 할게요.

우리는 다음 여행 때 다시 만나도록 해요.


그때까지,

잘 지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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