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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Jun 07. 2024

여행하다 죽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4.  리스본

저기 오네요! 낡은 노란빛을 온몸에 두르고 수십번은 덧칠했을 것만 같은 전차가 말이에요. 빼꼼 솟은 머리 위로는 먼지 때문에 잘은 보이지 않지만 28번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어요. 이 전차는 리스본에 오는 이방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타야 하는 전차이자, 특유의 매력 덕분에 별다른 일이 없더라도 리스본에 머무는 동안 몇 번은 더 타야 하는 전차입니다. 특히 28번 전차는 다른 노선과 달리 과거의 구식 열차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엉덩이가 조금 아프고, 눅눅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릴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들이 28번 전차를 옛것 그대로 남겨둔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28번 전차 노선은 리스본에서 가볼 만한 거의 모든 관광지를 통과해요. 그래서 목적지가 어디이든 이 전차를 타면 한 번은 당신을 목적지로 데려다줄 거예요. 그리고 일곱 개의 언덕으로 만들어진 도시라는 별명답게 도보 여행을 고단하게 만드는 오르막길을 28번 트램은 상냥한 신사처럼 손을 내밀어 도와주죠. 우리도 오늘 이 28번 전차를 타고 리스본 여행을 떠나보려 하는데요. 문이 닫히기 전에, 어서 전차로 올라오세요.



한국의 지하철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28번 전차가 너무 짧다는 느낌을 받으실 거예요. 그 이유는 리스본의 골목길은 경사가 급하고 고저 차가 심하기 때문인데요. 열차가 짧아야만 그 길을 멋지게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에 28번 전차는 이렇게 짧게 만들어졌어요. 차체가 짧다 보니 앉을 만한 자리도 많지는 않은 편이죠. 게다가 좌석은 100여 년 전의 그것 그대로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서 앉는다고 해도 그렇게 편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과거의 전차를 즐길 수 있는 것은 28번 전차가 유일하니 이 낡고도 고풍스러운 매력을 즐기며 목적지로 떠나볼게요.


아, 목적지가 어디냐고요? 골목 구경을 하다가 내릴 곳을 놓치면 어떻게 하냐고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종점까지 갈 거니까 말이에요.



자, 이제 내려볼까요. 아마도 이곳에서 내리는 건 우리밖에 없을 거예요. 그도 그럴 것이 이 종점의 이름은 '프라제르스 공동묘지'거든요. 기껏 리스본까지 와서 공동묘지를 첫 여행장소로 삼다니…. 뭐 이런 가이드가 다 있어? 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묘지를 거닐면 조금씩 지워질 거라 믿습니다. 그러니 같이 걸어보도록 하죠.


프라제르스의 뜻을 풀어보면 '기쁨의 묘지'라고 해요. 묘지에 붙는 단어 치고는 어울리지 않네? 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 묘지는 이름에 걸맞게 대부분이 새하얀 석재로 만들어져 있어요. 그래서 날이 좋은 날 방문하면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길을 거닐 수 있죠. 정말 이곳이 묘지가 맞나 싶을 정도인데요. 조금만 더 걸어보도록 해요.


제가 리스본의 첫 여행 장소로 이곳을 고른 이유. 그것은 바로 리스본을 가장 사랑했던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리스본에서 태어나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리스본을 떠나지 않았던. 리스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책 원고보다 리스본 가이드북 원고에 더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던 사람이에요. 그게 누구냐고요? 바로 페르난두 페소아 입니다.


리스본에서 태어난 페소아는 리스본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고 콜레라가 창궐했던 시기 만들어진 이곳. 프라제르스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는 죽기 전, 포르투갈어로 쓴 마지막 시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다고 하죠.


"내게 와인이나 좀 더 주시오. 삶이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평생을 삶에 대한 철학과 사유를 이으며 살았던 한 시인이 남긴 마지막 시치고는 지나치게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이번에는 그가 죽기 하루 전, 영어로 남긴 시구도 한 번 만나볼게요.


"나는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페소아는 생의 시간에는 삶의 무용을 노래했었습니다. 그러다 죽음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는 무용이 아닌, 삶의 불확실성을 노래했죠. 이 마지막 한 줄로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혹시 그는 다음 세계로의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말입니다.


이 추측이 가능한 이유는 페소아만의 독특한 여행법에 있어요. 페소아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머문 시기를 제외하면 리스본을 떠난 적이 없어요. 그럼에도 그는 항상 여행했다. 라고 말했는데요. 눈을 감고 가고자 하는 곳을 떠올리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여행이라 생각했던 것이에요. 심지어 "짐을 싸고 타지로 떠나는 것은 상상할 줄 모르는 이들이 하는 것이다."라며 일반적인 여행법을 비판할 정도였어요.


말하자면 페소아는 모든 것을 자신의 지성으로 또는 상상력으로 알 수 있다고 믿은 시인이에요. 하지만 그런 그 역시 죽음과 그 너머의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랬기에 시인은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미의 영역에 직접 발을 딛고 싶기도 했을 거예요. 이를 위해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인정'이었죠. 자신의 무지, 자기 부족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페소아는 항복의 깃발에, 앞서 소개한 마지막 시를 남긴 것은 아닐까…. 제 멋대로 상상해 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페소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얼른 시인의 무덤 앞에 꽃이라도 한 송이 남겨두고 싶어지지 않으신가요? 하지만 아쉽게도 프라제르스에 더는 페소아가 잠들어 있지 않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리냐고요? 살아생전에 포르투갈어로 된 책이라곤 한 권을 출간한 것이 전부인 페소아. 그만큼 그는 사는 동안에는 시인의 명예를 누리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가 죽고, 그의 방에 있던 트렁크에 쌓인 수없는 시들은 그를 포르투갈의 국민시인으로 만들어주었죠. 그런 사후의 명성은 그의 잠들 장소를 리스본의 영웅들만이 머물 수 있는 곳.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옮기게 해주었는데요. 그런 이유로 지금 페소아의 묘는 이곳 프라제르스가 아닌, 리스본 외곽 벨렝 지구에 있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또 질문을 하고 싶은 표정일 것 같은데요.

"그러면 왜... 제로니무스가 아닌 프라제르스로 여행을 온 건가요?" 이런 질문 말이에요.

그건 묘지를 나서 조금 걸으며 이야기해 드릴게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 28번 전차로 두어 정거장을 가면 우리는 페소아의 박물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곳은 페소아가 말년을 보낸 집을 개조한 곳인데요.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걷는 이 길을 한때 페소아도 산책하듯 거닐었다는 것이죠. 게다가 리스본의 풍경은 과거에서 현재로 쉬이 바뀌지 않기에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이 골목의 분위기는 비슷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페소아와 함께 산책하는 기분으로 그의 집에 들어서 보겠습니다.


페소아 박물관은 문을 여는 순간 페소아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직원들의 환영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페소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페소아를 찾는 이방인들에게도 넉넉한 미소를 건네는데요. 1층에 있는 기념품 가게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번역된 페소아의 책들이 놓인 서재들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티스트들이 남긴 페소아의 거대한 초상화와 일러스트 작품도 벽에 걸려 있으니 충분히 시간을 들여 감상해 보면 좋을 거예요.


감상을 모두 마치셨다면 이제 2층으로 가볼게요. 그곳에서 우리는 페소아가 마지막을 보낸 방. 그곳이 재현된 장소를 구경해볼 수 있습니다. 고흐의 작업실을 연상케 할 정도로 소박한 그 방에는 작은 침대와 옷장이 전부에요. 하지만 이곳에는 페소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물건이 하나 있죠. 바로 페소아의 트렁크입니다.



페소아가 죽음을 맞은 뒤, 그의 방에는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 같은 커다란 트렁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트렁크 안에는 출간하지 않았던 수많은 시의 원고가 어떤 정렬도 없이 마구 담겨 있었죠. 연구자들은 제각기 트렁크에 담긴 시를 읽고 감상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는데요. 그곳에서 연구자들은 무수히 많은 페소아의 분신과 그들이 쓴 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작품 각각이 한 권의 책이라 말해도 무방할 정도라는 사실을 입을 모아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연구자들은 리스본의 역사에 남을, 이 작품들을 끊임없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펴는 사람마다 구성이 다르다는 <불안의 책>을 출간하게 되죠. 페소아가 딱히 목차를 만들어두지 않았기에 묶는 사람마다, 또 읽는 사람마다 달리 읽힌다는 이 책은 리스본에서 태어난 가장 특별한 작품으로 리스본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는데요. 그 사랑이 너무 커서였을까요? <불안의 책>은 또 다른 언어로 타국에서 다시금 태어났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페소아가 말한 상상의 여행법을 닮은 것 같기도 한데요.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전 세계로 떠날 수 있다는 그의 말을 이 한 권의 책이 당당히 선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 이제 페소아의 방에 놓인 트렁크. 그 안에 담긴 원고를 둘러볼까요? 파손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모두 사본이니까 말이죠. 아무 원고나 한 장을 들고 비록 한국어는 아니지만 한 번 소리 내 읽어보세요. 그 글을 완성한 후의 페소아처럼. 혹은 그의 분신이 된것처럼.



리스본에서 만난 페소아와 <불안의 책> 여행길. 어떠셨나요?

저는 어떻게 엮어도 한 권의 책이 되는 <불안의 책>이 마치 우리의 여행길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정해진 루트, 정해진 시간표, 정해진 장소와 또 정해진 감정들.

그런 것으로 잘 완성된 한 권의 책이 아닌, 순간의 장면과 순간의 감정이 마구 헝클어져 채워지는 그런 여행길 말이에요.

부디 오늘 당신의 여행 트렁크에도 그런 것들이 가득 담기길 바라볼게요.

그럼 우리는 다음 여행 때, 다시 만나기로 하죠.


그때까지.

잘 지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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