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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Oct 21. 2024

【소설】
놀러 오세요, 담담 놀이터에 #4.

선긋기 놀이

 "... 양이잖아!!"

 유연이 본 것은 덩치가 꽤 큰 양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은 물론이고 처음 보는 동물들에게도 극강의 친화력을 지닌 유연이었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유연은 당장 달려가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양을 끌어안으려는 찰나, 양은 놀라운 속도로 유연을 피해버렸다. 덕분에 유연은 그 상태 그대로 넘어졌다.


 "야... 양아..." 유연이 넘어진 것을 본체만체하며 갈 길 가는 양을 보며 유연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유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고는 다시금 양에게 다가가 같은 속도로 걸었다.


 "양아, 너 이름이 뭐야?"


 양은 이번에도 안 들린다는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말하기 싫어? 사춘기야? 아니면 애인한테 차였어? 네 털 너무 덥데? 그래서 추워지면 다시 만나재?"

 되지도 않을 말을 하다가 유연은 은근슬쩍 손을 뻗어 양의 등을 쓰다듬어 보려 했다. 그러자 양은 빠르게 뒤를 돌아보며 째려보듯 유연을 바라보았다.


 "아…. 안녕."


 손이 민망해진 유연은 그대로 인사하듯 흔들었다. 하지만 양은 아까보다 더 불편한 심기를 보이며 유연을 째려보았다. "…. 하세요?"


 존댓말로 인사를 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그제야 양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대체 뭐지... 저 양은?"


 유연은 뒤뚱거리듯 걷는 양의 뒤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원래 길을 가려고 했는데…. "뭐야! 까먹었잖아!! 어느 길로 가려고 했더라.…?" 유연은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방금 한 걸 까먹고 그러냐…. 몰라. 이럴 땐 방법이 있지."


 유연은 양팔을 걷어붙였다.


 "어.느.곳.으.로.갈.까.요.알.아.맞.춰.봅.시.다.딩.동.댕.동"


 끝이 아니었다.


 "댕.동.딩.댕.동! 저기다!" 



 6. 

 '알아맞혀 봅시다' 놀이는 재미는 있어도 신통치는 않았는지 유연은 몇 번이나 길을 헤맸다. 그럴 때마다 '알아맞혀 봅시다'를 했고, 결국은 도착할 수 있었다. 유연이 교월리에 온 목적이 있는 곳. 엄마가 만든 놀이터에.


 "그나저나 엄마는 왜 이런 곳에 놀이터를 지은 거야? 키도 작으신 분이 올라오기 힘들게시리... 정말 끝까지 딸 고생 시키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유연의 불평처럼 엄마가 지은 놀이터는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웬만한 아이들이라면 놀러 오다가 지칠법한 그 정도의 높이. 천천히 걸어 올라오다 보면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을 것만 같은 높이. 그곳에 엄마의 놀이터가 있었다. 그 언젠가 유연도 머물렀을 놀이터가 있었다.


 "자, 그럼 들어가 볼까?"


 몸을 돌려 집으로 한때는 유치원으로 쓰이던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었다. 유연이 쓰고 있던 모자가 바람에 날아갔다. 유연은 서둘러 모자를 쫓아갔다. 그리고 겨우 바람이 잦아진 틈을 타 모자를 잡았다.


 "세이프!"


 유연은 신난 표정으로 허리를 폈다.


 "해에…." 유연의 눈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있었다. 햇빛이 잘게 조각낸 바다와 천천히 오르내리는 파도. 그 사이로 오가는 작은 배 몇 대. 구름과 수평선, 그리고 작은 해변의 선이 선명히 나뉘어 있는 교월리의 바다가 있었다.

 .

 .

 .

 "어? 이게 뭐야? 유연이 언제 이렇게 큰 거야?"

 어린 유연은 입이 귀에 걸리지 않게 표정 관리를 했다. 하지만 1초가 채 지나기 전에 함박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컸어? 나 진짜 컸어?"


 유연은 몇 번이고 벽에 그려진 선을 보고 전신 거울이 있는 안방에서 몸을 비춰보고, 다시 벽에 그려진 선을 보고

는 팔짝팔짝 뛰었다. 그런 유연의 모습을 보며 아빠는 "수고했어."라고 말했다.


 "수고? 그게 뭔데?"


 아직 많은 단어를 알지 못했던 유연이 물었다.


 "수고? 음... 그러니까…. 고생했다고."


 아빠는 왠지 진땀을 흘리는 눈치였다.


 "고생? 그건 뭔데?"


 유연이 다시 물었다.


 "고생? 그건 말이지... 수고... 랑 비슷한 건데. 이를테면..." "이를테면? 그건 또 뭔데?"


 "이를테면은 말하자면 이랑 비슷한 건데..." 아빠의 모습이 딱했는지 유연의 어마가 아빠의 머리를 누르며 말했다.


 "우리 유연이 키 크려고 먹기 싫은 것도 잘 참고 먹고, 더 놀고 싶은데도 꾹 참고 일찍 자고. 운동도 열심히 했지?"

 유연은 당연하다는 듯, 혹은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수고라고 하는 거야.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애쓰는 마음과 행동."


 유연은 다시 한번 팔짝 뛰며 말했다.


 "그럼 나 수고 했네. 아니지, 수고 많이 했네. 그치? 엄마? 그치? 아빠?"


 "그렇다니까."


 유연은 믿기지 않는지 다시금 벽에 그려진 선을 손으로 만져보고 뒤를 돌아 머리끝에 대보며 즐거워했다. 그 별것 아닌 한 줄의 선이 그렇게나 기쁠 수 없었다.

 .

 .

 .

 지금 눈앞에 펼쳐진 저 선들처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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