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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Jan 07. 2017

첫 줄

“작년 생일에”라고 말하면 꽤 오래전 일인 것 같습니다. 1월이 생일이신 분들이라면 1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12월이 생일인 저 같은 경우에는 겨우 2주 정도 지난 일입니다. 아무튼 작년 생일에 노트를 한 권 선물 받았습니다. 작은 포켓 사이즈의 몰스킨 노트였습니다. 노트를 받으며 내년이 되면 첫 줄을 시작해야겠다며 책상 위에 올려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해가 시작되었고 노트를 처음으로 펼칠 수 있었습니다. 


첫 줄은 무엇을 쓸까?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펜의 버튼을 몇 번이고 다시 눌렀습니다. 정말이지 쓸모없는 걱정이었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여러 후보들을 두고 고심했습니다. 새로 쓰려 하는 소설의 시놉시스를 남길까도 했고, 진행 중인 웹툰의 다음 화 뼈대를 잡아볼까도 생각했습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노트의 다음 여러 장이 같은 내용으로 채워질 것 같았고, 후자의 경우는 한 해의 시작으로는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고개를 들어보니 개인 블로그 화면이 보였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한 ‘달문의 느림 서점’에서 바꾼(이것 역시 굉장히 오랜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죠.) Bookstore. Romain et Emile이라는 타이틀이 보였습니다. 이 이름의 스펠과 스펠이 그려진 모양, 그리고 타이틀을 입에 머금을 때 생기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노트의 첫 줄에 Bookstore. Romain et Emile을 적어 버렸습니다. 제목을 적고 나니 그 아래 남길 글은 쉽게 정해졌습니다. Bookstore. Romain et Emile에서 펼쳐낼 페이지와 그 안에 담길 주제를 죽 적어 나갔습니다. 몇 개 에를 들어보면 ‘로맹 가리’,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리틀 포레스트’, ‘의자’ 같은 것들이 적혀졌습니다. 주제 밑에 본문을 적지는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서는 아니었고 한 해의 첫 줄에 무게를 더하고 싶지는 않아서였습니다. 필요한 본문이 있다면 다음 장에 적으면 충분할 일이었지요. 아직 페이지는 충분히 남아 있었으니까요. 


첫 줄을 적고 나니 얹혀가던 생각들이 조금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첫 줄>이라는 시를 쓴 심보선 시인도 

비슷한 심정이었을까요? 시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첫 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
미래의 열광을 상상 임신한
둥근 침묵으로 부터
첫 줄은 태어나리라
연서의 첫 줄과 
선언문의 첫 줄
어떤 불로도 녹일 수 없는 
얼음의 첫 줄
그것이 써진다면 죽음의 반만 고민하리라
나머지 반으로는
어떤 얼음으로도 식힐 수 없는
불의 화환을 엮으리라 


첫 줄이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라는 시인의 마음. 그 마음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은 한 해가 열린 지금뿐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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