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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Jan 22. 2017

눈을 싫어한 지는 오래되었습니다만

처음 눈을 만난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정도로 기억합니다. 더 어릴 때 눈을 봤을 수도 있었겠지만, 기억에 없는 것은 딱히 기억력이 안 좋거나 해서는 아닙니다. 단지 어린 시절 제가 살던 부산은 눈이 귀했을 뿐입니다. 그날은 아마도 오전 수업 즈음이었을 겁니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구름의 문을 열고 굵은 함박눈이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그 눈은 같은 반 아이들에게도 아마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저와 같은 나이니까 당연히 그랬겠죠. 선생님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었습니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창밖에 하염없이 눈을 빼앗기고 있었죠. 아마 그 시간 거리에서 학교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퍽 놀라운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눈이 그렇게 쌓인 장면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수업 진행이 멈춘 것은 당연했고 저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입을 벌리고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운동장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쌓이는 모습은 정말이지 처음 보는 장관이었습니다. 교장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을까요? 우리는 종이 울리기도 전에 운동장에 뛰쳐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전교생이라고 해봐야”라고 말하긴 어려울 정도로 학생 수가 많았던 학교였는지라(건물만 3동에 오전, 오후 반이 나뉠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운동장은 눈만큼 아이들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아이들은 흙인지 눈인지 모를 뭉치를 만들어 서로에게 던지며 놀았고 선생님들은 왠지 모르게 들뜬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몇몇의 아이는 손을 뻗었고 또 몇몇의 아이는 눈사람을 만들 구체적이고 몽상적인 계획을 짜기도 했죠. 문제는 그 아이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고 내릴 것만 같던 함박눈은 점심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쳐버렸고 운동장은 아이들의 열기로 모두 녹아 사라져버렸으니까요.


그 짧은 시간의 기억을 가지고 얼마나 긴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은 물론이고 그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이야기를 했죠. TV에서 다른 지역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그날 내린 눈도 저 정도는 됐지.”라며 알 수 없는 허세를 부린다거나, 30도가 넘는 어느 여름날. 선풍기를 틀어놓고 “그날처럼 눈이나 시원하게 내렸으면 좋겠다.”라며 더위를 달래기도 했습니다. 말과 달리 그 날 이후 서울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 한 번도 눈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 자주 눈을 만났습니다. 한 번은 허벅지까지 눈이 쌓인 날도 있었으니까 절대량으로 비춰보자면 이제서야 TV에서 다른 지역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으며 “그날 내린 눈도 저 정도는 됐지.”라며 타당한 허세를 부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집에 도착하자 신발이며 바지며 머리까지 홀딱 젖은 상태였습니다. 현관 앞에서 몇 번이나 몸을 흔들어댔지만 다 털어내지 못할 정도였죠. 겨우 눈을 털고 현관문을 열자 갑작스러운 따뜻한 공기 때문인지 안경에 김이 서렸습니다. 순식간에 집안이 하얗게 변한 것은 물론이고 숨이 가빠올라 입을 크게 벌려 숨을 마셔야 했습니다. 홀딱 젖은 몰골에 하얗게 김 서린 안경을 끼고 바보처럼 입까지 벌리며 서 있는 저를 보자 어머니는 혀를 찼습니다. 물론 마른 수건을 건네준 다음의 일이었지요. 겨우 몸의 물기를 닦고 눈의 나라가 되어버린 바깥의 사정을 묘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숨이 가빴는지 무엇에 흥분한 듯 말이 빠르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서 씻고 몸을 말려야 함에도 말을 멈추고 싶지 않아 엄마를 붙잡고 오랫동안 말을 했습니다. 엄마는 넓지 않은 창밖의 눈 쌓인 거리를 보며 별말 없이. 가끔 혀를 차는 정도로만 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날 함께 창밖을 바라보던 선생님처럼 창밖을 보며 말이죠.


오늘 새벽. 잠자리에 들기 전 작업실을 정리하다 창밖을 보았습니다. 눈발이 여리게 날리고 있었고 거리에는 높게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눈이 온 지 꽤 오래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왠지 모를 조급함이 들어 냉장고에 눈에 어울릴 만한 술과 안주는 없는지, 아이패드에 소복한 감정의 영화는 없는지 뒤적거렸습니다. 한참을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맥주 한 병과 얼마 전 사놓은 책을 꺼내 침대로 향했습니다. 그 사이 눈은 그쳐버렸습니다. 아직 운동장에 발을 뻗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하지만 괜찮았습니다. 내일은 밖에 나갈 일이 없었으니까요.


눈을 싫어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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