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안에서 자퇴학생이 늘어가는 계절이다.
1학기를 근근히 버틴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영혼이 쉬고 나면
다시 또 그 "근근히" 버틸 마음의 근육이 파열된다.
'학교에 왜 가야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 문장에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들어있다.
그래서 아이가 던지는 학교에 대한 존재 혹은 등교에 대한 의문은 시간을 두고, 잘 들어야 한다.
그냥 툭 던지는 '학교 가기 싫어'는 '내 말 좀 들어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럴 때는 "왜그래? 무슨 일인데? 누가 이렇게 힘들게 하지? 얘기해봐" 하면서 들을 준비를 해 줘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툭 던지던 말들이 한숨과 함께 시작될 때는 응석만은 아니다.
그 안에는 대부분 친구들과의 문제가 얽혀있고, 학업에 대한 부담과 교사와의 갈등도 묻어있다.
성적과 적극적인 생활 외에는 인정받기 힘든 학교라는 생태계는
학교를 힘들어 하는 학생들에게 그다지 여유롭지 못하다.
자주 엎드리고 아이들과의 모둠수업에서 소외되고, 의욕이 없이 수업 내내 멍하게 앉아있는 아이를 보면
대부분 아침 등교에 대해 회의적이다.
체력적으로 힘든 물리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아이들은 당위성을 내세우며 가지 않아도 되지 않냐는 반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공부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수업은 학원 다닌 아이들 위주로 빠르게 진행되고, 친구들은 제각각 시끄럽게 자기들끼리만 떠드는데 그 소리마저도 위선적이고 소음이라 불편한 것이다.
혼자가 편해지는 아이들.
사람을 만나 대면으로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고, 함께 생각을 공유하고, 너도 그러냐 난 그렇진 않더라를 무안하지 않게 주고받을 자신이 없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 개개인의 학생인권이 중요해 지면서 아이들은 '이해'의 틀을 잘못 뒤집어 쓰는 것 같다. 나를 이해받기 위해서, 내가 존중받는 방법은
공동체 속에서 빠져나와 개인적으로 싫고 짜증나고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공동체 활동에 대해 쓸데없고 나대는 '대중'이라는 무리나 같이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학교 활동은 어느 순간부터 '모둠'이나 '단체'활동이 낯설어지고 있다. 모둠이라 불편한 일들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그 생각을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 것을 자존심이나 개인의 인격이라고 보장해 달라고 침묵한다.
공동체가 없는 개인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자퇴를 고민하는 아이가 찾아왔다.
학교가 너무 힘들어서 그냥 집에서 조용히 보내고 싶다고.
탓할 수는 없지만 화를 냈다.
학교가 힘들다면 이겨내려고 노력해 보자고. 여기는 그래도 친구들도 있고, 선생님들도 있고, 함께가 존중받지만 혼자는 앞으로가 더 힘들어 질 수도 있지 않겠냐고. 틀에 박힌 잔소리를 했다.
물론 나는 학교만이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만이 정답을 가르치지 않으며, 학교만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없다. 공동체의 질서, 학문에 대한 지식, 함께 사는 사회의 공동체 의식, 선하고 공정한 정의. 어쩌면 책을 통해 어쩌면 유튜브를 통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을 더 다양하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살아있다.
혼자 할 수 있는 아이들에게 함께 하는 것을 가르치고
혼자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는 것을 가르치고
학생이라는 타이틀이 있기에 보호될 수 있는 비판적 허용과 행위의 실수들을 교정해 준다.
의지가 강한 독립적인 아이는 자퇴를 해도 괜찮다.
어쩌면 그 아이는 학교이기에 더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학교가 아닌 사회에서 더 큰 공동체와 틀에서 자신의 인정욕구를 채우며 더 크게 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의지가 약하고 학교가 힘들다는 아이들은 더더욱 자퇴를 말리고 싶다.
여기서 좀 더 이겨내 보며 마음 근육이라도 키우자고. 나중에 만나게 될 사회에서는 더 큰 제약과 불합리와 어려움들을 겪을텐데 경험의 힘을 키울 수 있는 곳은 여기가 가장 낫지 않냐고. 어차피 그 아이의 귓바퀴를 맴돌기만 할 말들을 뱉어본다.
1학년에 2명, 2학년에도 1명이 자퇴를 신청했다.
제각각 교과학습에 대한 어려움과 대인기피, 학교생활 부적응이 타이틀이 되었다.
학교를 그만두기 전에 위클래스에서 받던 상담은 학부모와 학생의 동의를 구하고 제외되는 실태다.
그러한 상담이나 과정을 겪어봐야 안할거라는 신념은 어디서부터 오는걸까.
그럼 다녀봐도 될 것이라는 가능성은 왜 늘 배제되고 마는가.
내 아이가 어느 날 개학을 앞두고 말했다.
"학교를 왜 가는지 모르겠어."
"왜? 왜그렇게 싫어해?"
개학해 봐야 선생들은 개학 첫날이라며 수업은 하지 않고 자습을 시키는데 어떤 날은 하루종일 그렇게 보낸단다. 그러려면 왜 개학을 그렇게 일찍 하느냐는 거다. 어떤 선생님은 자기가 진도를 어떻게 나가고 시험을 어떻게 칠 건지도 시험 직전에야 알려준다고 한다.
교육의 현장은 반성해야 한다.
교사의 살 권리가 외쳐지는 세상에 과연 교사다운 교사로 잘 살고 있는지도 반성하자.
언젠가 대학 3학년. 사범대학의 존폐가 이야기되고 대학등록금에 대해 시위가 이어지는 때.
교대생들은 시위에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교대생들에게는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라는 관문이 꽤 잘 다져져 있었기 때문이다.
중등임용고시처럼 사대, 일반대, 대학원이 모두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대생만이 치를 수 있는
이미 대학에서 1차 관문의 대상자로 정해진 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학교에서 마주해야 하는 삶은 그 관문의 허용과는 달리 처참하게 험난했던 것이다.
시위를 할 수 있는 젊음에는 임용고시로 보내고, 현장에 나가서는 스스로를 칼질하고 다듬느라 상처가 덧났으리라.
처음부터 교사는 없다. 교사는 만들어 지는 것이고, 그 과정은 학생들과의 만남과 치열한 실패들 속에 성장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실패를 거쳐 성장할 수 있도록 학생들의 실패와 과정도 지켜보자.
내가 과연 아이의 입장에서 자퇴를 생각하는 게 맞는가? 이미 합리화되고 균형잡히길 바라는 기성세대의 눈과 귀로 아이의 자퇴를 나무라기만 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고 나는 자퇴를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잘 생각했다."고는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