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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Aug 23. 2018

아홉 번째/ 타인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나요?

나는 항상 자신만만했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스스로 잘 깨우쳤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좋고 싫음을 나타내는 일로 억압받는 일이 적었던 행운 덕분일까? 아니면 혼나더라도 기죽지 말고 눈은 똑바로 보고 명확히 말하라던 부모님의 방침 때문이었을까. 나는 내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종류의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지, 어떤 장르는 재미있고 어떤 장르는 두장만 넘겨도 잠을 자는지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좁은 세계 안에 있던
나의 착각이었다.

나는 한 지역에서 초중고를 다녔다. 전학을 가본 적이 없다. 새로운 학년, 새로운 학교를 가도 말을 걸어볼 만한 아는 얼굴들이 몇 있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메뚜기마냥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살 줄은 몰랐다. 그래서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세계가 그런 느낌일 줄은 몰랐다. 존재하고 있는 세계인 줄도 몰랐다.


새로운 지역으로 대학교에 갔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4인실이었다. 세상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똑같은 구조의 방에 살면서 나는 겨우 박스 두개가 다였다. 많아질 것도 없었다. 오래 살다보니 기껏 늘어난 정도가 세 박스에 캐리어 하나. 하지만 기숙사 첫날 여섯박스를 들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하루 입은 옷은 빨아야 하는데, 햇빛에 잘 말려서 두세번 입고 빠는 경우도 있었다. 세면대에 발을 씻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씻는 것을 불쾌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취를 하면서는 화장실 청소를 왜 하는지, 하수구의 머리카락을 치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나의 기준에서는 상식인 일이 타인의 기준에서는 상식이 아니었다. 교실에서 매일 같은 반 친구들과 12시간 넘게 같이 있는 일보다 잠잘 때 빼고 두어시간 얼굴보는 룸메이트와 맞추는 일이 훨씬 어려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12년간 학습한 일과 처음 해보는 일이 어려운 건 당연했다. 다행히 대학교 3학년 중반부터 졸업 까지는 잘 맞는 룸메이트를 만나 서로에게 조율하는 방법을 많이 배웠다. 그러면서 나는 나 스스로 털털하다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청소나 빨래에 강박을 가지고 있단 걸 깨달았다.




대학교 2학년 때 친구가 와인 동호회가 있다고 해서 호기심에 가본 적이 있었다. 와인은 맛있었고 사회인들 사이에서 아직 병아리 같았던 대학생인 나는 삶의 다양성에 대해 배웠다. 시간을 내서 자기가 좋아하는 걸 꾸준히 즐기는 사람이 많다는 것, 비혼의 삶이 있다는 것, 내게 호의를 가진 듯 이성으로 접근하는 삼촌 나이뻘 남자들도 존재한다는 것. 아 그리고 술은 맛있었지만 나는 이런저런 와인 구분할 만큼의 흥미도 느낌도 크게 없다는 것. 모두 겪어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직장 신입 때 동료의 소개로 독서 모임을 시작한 적이 있었다. 읽은 책을 매개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몇 가지 새롭게 다가온 지점이 있었다. 필독도서나 베스트셀러, 추천도서 같은 책이 나에게 맞지 않는건 내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같은 책을 읽어도 경험한 세계에 따라 다르게 읽고 다른 지점을 이야기 한다는 것, 생각을 나눌 때는 말을 하고 드러내는 것보다 듣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림책은 아이들만의 책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초등학생 때 이후 그림책을 다시 잡기 시작했다. 후쿠다 이와오, 백희나, 이수지, 전미화와 같은 작가들을 만난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애인과 만나는 일은 더욱 특별한 경험이다.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그 사람의 취향, 관심, 경험하는 세계, 꿈, 사소한 습관, 편견 그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건 그사람을 사랑하기에 나온 관심일 수도 있고 내 삶에 이미 깊숙히 들어와서일 수도 있고. 내가 그와 맞는 것보다 다른 점이 훨씬 많다고 느껴지는 순간, 나는 그를 알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고, 서로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 대화하고 각자의 사정을 공유하면서.


오래 만날 수록 그 사람의 세계에 대해 깊이 알게 된다. 함께 경험하면서 나에 대해서도 더 잘 알아간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자주 하고 상대에게 끝내 이야기 하지 않는 지점은 어디인지. 나는 어떤 순간 위로가 필요한지. 상대방과 함께 하길 원하는 순간은 어디인지. 나는 사랑해서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인지 또는 사랑해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 어디인지. 나는 언제까지 상대방을 기다려줄 수 있는지. 내 인내심의 한계점은 어디인지. 상대방의 사랑이 고갈되는 지점은 어디였고, 나는 사실 언제부터 권태기가 왔었는지.


누구를 만나도 오래 가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다. 나는 내가 누구와도 맞추지 못할 사람 같았다. 말로는 이 세상 직업탐방 다 하나봐요 하면서 웃었지만 속으로는 나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했다. 내가 믿고 있던 여러 지점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비정상인가? 요즘에는 이상한 사람밖에 없나? 난 어디까지 포기해야하지? 나는 누군가를 만나기엔 적절하지 않은 사람인가?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 사랑하는게 다시 나에게 가능한 일일까? 난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지점을 참지 못하는 걸까?


지금도 그 지점에 대해 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풀리지 않은 고민도 있다. 다만 지금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문제의 원인을 전적으로 나에게 또는 상대방에게 전가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내 역치가 오기 전에 상대방에게 알리고 그에게도 대비할 공간을 주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또는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지점이 오면 캔디처럼 견디는게 나에게 어떤 고통인지 알아가고 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가면서 잘 몰랐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부딪쳤던 것 같다. 생가보다 즐거웠던 순간도 있었고 내가 기대했던 것에 한참 못 미치는 순간도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다시 겪고 싶지도 않아서. 다만 나는 늘 나의 세계를 다른 사람들을 통해 넓혀가며 나는 어떤 사람이구나 깨달아 가는 과정이 참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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