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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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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May 24. 2023

29. 폭식의 기록

휴직을 한 이후로 폭식이 반복되고 있다. 그나마 남편이 집에 있는 날에는 나은 편이다. 옆에서 계속 말을 걸고 움직이는 사람이 있으니깐. 그런데 남편이 출근한 이후나 출장 중일 때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닥치는 대로 먹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물론 이건 하루이틀의 일은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내 폭식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고등학생 때다. 우울증과 함께 불어나던 몸. 내 삶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없고 자유롭지 못할 때 유일하게 내가 마음껏 할 수 있는 일이 먹는 것뿐이었다.


나의 폭식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엄청난 양을 한 번에 먹어대는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폭식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나는 주로 고열량의 음료나 디저트를 먹는다. 초콜릿이나 과자 같은 건 그리 배가 차는 종류는 아니다. 오히려 그래서 끝없이 들어가는 면이 있다. 오늘은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낸 후 모처럼 여유롭게 운동을 하고 청소를 했다. 약간 허기지는 기분이 들어서 쌀국수를 꺼냈다. 계란을 부치고 김치도 꺼냈다. 여기까지는 건강은 아니어도 평범한 식사의 범위다. 다 먹고 난 뒤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식빵에 잼을 듬뿍 발라 오트밀유와 함께 먹었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한참을 먹었다. 그러고 나니 바삭한 게 먹고 싶어서 과자를 꺼냈다. 봉지과자를 꺼내면 멈출 수 없는 걸 알기에 소포장되어있는 비스킷 류를 꺼냈다. 하나.. 둘.. 셋.. 문득 정신이 들었다. 얼른 이를 닦고 샤워를 하고 나왔다. 만약 저녁때였으면 냉동실에서 만두나 너겟종류를 꺼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폭식은 내가 자각할 때까지 꾸준히 무언가를 입에 넣는다. 하나만 더, 더, 더.


폭식은 내 인생의 굴곡과 함께 오르락내리락 반복된다. 고등학생 시절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학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때, 대학생 시절 외조부의 병환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때, 졸업 후 계약직 일자리에서 아등바등 취업 공부할 때, 바라던 독립도 취업도 했는데 직장에서 성희롱과 관리자의 괴롭힘에 시달릴 때,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며 집에 고립된 채로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 그리고 지금. 떠밀리듯이 휴직을 하고 집에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 바로 지금.


오늘은 낮이었지만 폭식의 시간은 주로 아기를 재우 고난 뒤다. 아기와 함께 있을 땐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 몰두해 있을 시간이 없다. 식사와 간식을 챙기고, 씻기고 뒷정리하고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기저귀도 갈고 약도 먹이고 놀아주고 칭얼거리는 걸 받아준다. 나를 위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 아기의 컨디션을 보며 결정한다. 어떨 때는 제발 어서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고 1분 간격으로 시계를 바라볼 때도 있다. 빨리 이 소모적이고 지루한 시간이 끝나고 쉼이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아기를 키우는 일은 늘 감정에 대한 변명을 동반하곤 한다. 아기가 소중하고 아기의 성장은 행복하고 이 부드럽고 따뜻하고 작은 생명이 나에게 온몸을 맡길 땐 포근해진다. 하지만 아기는 단 한순간도 혼자 있을 수가 없다. 삶의 모든 부분을 양육자인 나에게 의지해야 한단 건 내 모든 삶이 아기에게 고정되어 있고 어떤 시간도 나를 위해 쓸 수가 없단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로해지는 일이다. 늘 고정되어 있는 일정한 루틴들이 지루하고 지겹고 벅찬 것은 나를 대체할 인력이 아무 데도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기도 하다.


아기가 자고 나서도 온전한 자유라고는 할 수 없다. 육퇴라고는 하지만 아기를 두고는 집 앞 편의점도 갈 수가 없다. 기껏해야 현관 앞에 있는 택배 들여오는 게 유일한 문밖 외출인 셈이다. 결국 집에 있어야 하는데 집에서 조용히 할게 뭐가 있겠는가. 아기 보느라 못 먹었던 저녁을 늦게서야 챙겨 먹고 집 치우고 내일 아기 먹을 반찬하고 나면 9시 반, 10시가 되어있다. 지친 몸으로 거실 바닥에 누워 웹툰이나 웹소설 몇 편 보다 자는 게 여가의 전부다.


남편이 집에 있는 날엔 좀 낫다. 아기를 돌아가며 돌볼 수 있고 혼자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백업이 되는 상대가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좀 편하다. 허겁지겁 먹을 때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대화하며 밥 먹을 상대가 있고 아기가 자고 난 뒤에도 일을 조금 일찍 끝낼 수가 있다. 하지만 남편은 잦은 출장과 주말출근을 동반한 불규칙적인 삶이 직업인 사람이다. 남편이 없을 때면 이 오갈 데 없는 무력감과 억압감 분노를 어디서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기가 아프지 않을 땐 그나마 낫다. 어린이집을 보내고 나면 5-6시간 정도 내 시간이 주어지니까. 사실 그중에서도 집안일을 빼고 나면 2시간 정도만 내 시간이지만. 하지만 15개월 아기는 아픈 게 그 아이의 일인가 싶을 정도로 자주 아프다. 그렇게 아기와 나 둘이서 집에 있을 때면 미쳐버릴 것 같다.


폭식의 고리를 인지했으니 멈추고 싶은데, 모르겠다. 사는 게 나아질 구멍이 없는데 어디서 어떻게 멈춰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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