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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Jun 30. 2023

첫 이사

오늘은 결혼하고 나서 살던 첫 집을 정리하고 새 집으로 이사를 가는 날이었다. 그동안 원가족과 살며 또는 혼자 살며 수없이 많은 이사를 경험했지만 이번 이사는 그보다 더 특별했다. 왜냐하면 내가 주도적으로 하는 이사 중에 가장 규모가 컸기 때문에.


겨우 10분 거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거였다. 새로 가는 곳은 이전 집과 비슷한 구조의 아파트인 데다 새로 입주하는 곳으로 가기 전 몇 개월만 살러 가는 거고 포장이사라서 할 일은 적은 편이었다. 그래도 역시 이사는 이사였다. 남편과 함께 텅 빈 신혼살림을 채워가면서 이 집을 언제 채우나 했던 게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니었는데 어쩜 집에 그렇게 물건이 꽉꽉 들어찼는지. 그리고 결혼 후 첫 이사라 그런지 귀찮아서 아무렇게나 박아놓은 묵은 짐들은 어찌나 많은지. 필요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밑작업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당근으로 온갖 살림살이를 팔고 나눔 하고 남편의 지인에게도 아기 것을 물려주기도 하고 분리수거장을 수없이 드나들면서 짐을 줄였다. 이 작업은 끝이 없어서 이사 전날까지도 실외기실에 있던 선반을 당근에 나눔 할 정도였다. 미니멀한 삶을 추구하기는 개뿔. 이렇게 꽉꽉 채우는 삶이었다니.


그리고 현대인의 새로운 학습법인 유튜브도 열심히 봤다. 그중에서 이삿짐센터 사장님의 팁 다섯 가지가 꽤나 유용했다. 각종 설치기사님은 짐 정리가 마무리된 4시 이후에 예약을 잡는 게 좋다는 점이 특히나 그랬다. 왜냐면 4시 반에 인터넷 기사님이 오시기 직전에야 티비 및 컴퓨터 설치가 완료되었기 때문에.




이사 당일 오전은 생각보다 뻘쭘했다. 지인들로부터 유명한 지역 업체를 소개받아서 예약을 했는데 역시나 그분들은 전문가셨다. 다섯 분이 오셔서 해체하고 풀고 싸고 옮기고 치우는 손길이 착착 맞아서 어쩜 내가 끼어들 자리가 하나도 없던지. 심지어 이미 내 머릿속에서 잊혔던 결혼반지와 몇 년 전에 잘 하고 다녔던 내 목걸이도 찾아주셨다. 쓰레기도 많이 나왔다. 분명 치운다고 치웠는데 이곳저곳의 틈새에서 나온 세월의 흔적은 어마어마했다. 그래도 그 와중에 환기는 잘하고 살았던 보람은 있는 건지 가려졌던 부분에 곰팡이가 없던 것은 뿌듯했다.


짐을 싹 빼고 집안을 다시 돌아봤다. 계약기간이 며칠 더 남아서 오늘 미처 못한 퇴거 작업을 할 여유가 있긴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이 집과 급하게 이별하는 기분이었다. 처음 이 집을 보며 남편과 여길 어떻게 채울까 이야기하던 추억들도 떠오르고 이 자리에서 뭘 했는데 하는 이야기도 하고 어린이집에 보낸 아기가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 얼마나 놀랄까 예상도 해보고. 그런 이야기를 해도 현실감이 잘 들지 않았다. 남편과 결혼 생활을 시작한 첫 집이라 공간에 정이 들었나 보다. 이 집에 영영 살거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막상 떠나는 일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단 생각을 하며 오전을 마무리했다.


그래도 남편과 함께 이리저리 챙기고 다니느라 힘이 쭉 빠졌는지 중간중간 이사업체 직원분들과 간식을 챙겨 먹었는데도 점심으로 먹었던 국밥이 술술 들어갔다. 오후 일정이 남은 게 아니었으면 막걸리도 한잔 들이켜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한 시간도 안 돼서 어서 짐을 풀어야 한다는 재촉전화를 받고 얼른얼른 일어났다.


비교적 한가했던 오전과 달리 오후는 배치 문제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바빴다. 우리 집은 구조를 이상하게 뽑기로 악명 높은 곳에 살기도 했고 아기가 태어나면서 원래 있던 공간을 재구성하지 못하고 그대로 아기 짐을 추가시킨 경우라 배치가 중구난방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세탁실에 세탁기밖에 안 들어가서 건조기는 옷방에 들어갔고 김치냉장고도 거실 공간이 없어서 옷방에 있었다. 그래놓고 나니 아기 옷장은 옷방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아기 옷은 책을 싹 다 처분하고 서재방에 넣었다. 수많은 아파트들 옵션에 하나쯤은 있다던 붙박이장도 없었다. 정말 첫 입주 신축 아파트 맞았니.


어쨌든 새 집은 그런 문제는 없어서 세탁실에 세탁기, 건조기, 김치냉장고를 넣을 수 있었고 옷방에 우리 가족 옷을 모두 넣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서재방은 덜렁 컴퓨터 하나 남은 게 얼마나 상쾌하던지. 이제 빨래 건조대도 컴퓨터 옆이 아니라 실외기실 옆 공간에 넣을 수 있는 게 얼마나 깔끔하던지. 붙박이장과 팬트리 공간에 잡다한 짐들과 소모품들을 넣을 수 있어서 눈에 안 보이는 게 얼마나 깨끗하던지! 속이 확확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시 짐을 풀면서 나오는 쓰레기들도 정리하고 이삿짐 풀기의 프로님들이 우리 부부보다 정리를 훨씬 잘해주셔서 비록 자잘한 물건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되었지만 각 잡힌 집을 보는 건 훨씬 가벼운 기분이었다.




이사를 마무리하고 힘쓰는 일은 거의 안 했는데도 어쩐지 너덜너덜해진 몸과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 우리는 아기를 돌보고 뒷정리를 했다. 아기를 재우고 나서는 나는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집안 물건들을 재배치하고 남편은 이사오며 새롭게 사야 할 소모품을 장을 보고 왔다. 그리고 밤 10시 반. 이제야 거실에 널브러진 채로 지난 집과 오늘의 집을 이야기한다. 부디 내일부터 이 집에서 쌓아갈 이야기들은 평화가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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