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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Sep 25. 2018

열아홉 번째/ 집사야, 사료가 입맛에 맞구나.

게으른 캣맘이 마주친 냥냥이

오늘도 은밀한 밀당이 시작됐다.


낮에는 절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어두운 저녁에만 내 눈치를 살살 보는 깜냥이가 있다. 오늘도 저쪽에서 슥 하고 차밑으로 지나가는 걸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걸음걸이를 빨리 하려다 멈칫 했다. 오늘 못 볼수도 있었는데 내가 서두르면 또 저 멀리 도망갈 게 뻔하다. 나는 두어걸음 더 물러섰다. 주변을 보니 아직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지퍼백에 넣어두었던 사료와 종이그릇을 꺼냈다. 깜냥이와 눈을 마주치면 늘 그랬듯이 일부러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낸다.


‘오늘은 밥자리를 어디에 둘까?’ 주변을 둘러본다. 깜냥이와 나의 눈맞춤을 고려할 때 오늘은 차 옆쪽 으슥한 풀밭 옆에 둬야겠다. 깜냥이와 눈을 마주치며 일부러 사료 쏟는 소리를 크게 냈다. 깜냥이는 나를 의식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나는 사료를 놓고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킨 다음 미련없이 뒤돈다. 오늘 밥자리가 성공했길 바라며.


충분히 먹었겠다 싶어서 다시 돌아와보니 밥자리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경계심이 심한 깜냥이는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도로 주변이 싫었나보다. 깜냥이가 자주 다니던 길목이 어디였지? 하다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구석진 한곳에다 사료를 옮겨놓았다. 몇십분 뒤 다시 가보니 밥자리가 말끔하다. 오늘은 이곳인가보다. 사료와 물을 충분히 놓고 다시 집에 돌아갔다. 아침에 밥자리를 치우려 살짝 가 보니 다행히 배불리 잘 먹었나보다. 오늘도 깜냥이는 하루를 더 살았다.




사실 이 근방을 모두 돌며 챙기지는 못한다. 매일 챙기지도 못한다. 내가 마주치는 아이들만, 내가 시간이나 금전적인 여유가 있을 때 가끔 밥을 주는 게으른 캣맘이다. 밥자리를 정해놓고 주지도 못한다. 그리고 난 이곳을 언제 떠날 지 알수 없다. 길집사로서의 결격 사유가 여러 개지만 용기도 없고 근성도 없는 나는 그래도 밥을 준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래도 내가 밥을 주면 그날 하루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가족이 사는 아파트에는 길냥이들이 많다. 지나다니다 보면 무수한 고양이들과 마주친다. 사람을 보면 후다닥 피하는 고양이들이 대부분이지만 누군가 밥을 준 흔적들이 있다. 개중에는 사람이 지나다녀도 그루밍을 하는 고양이가 있기도 하다. 가끔 음식점 앞이나 카페를 드나드는 고양이들이 있다. 그런 고양이들은 차림새가 말끔하다. 사람이 오거나 거리를 좁혀도 무신경한 고양이들도 있다. 친척동생 집 근처 마당에 와서 시시때때로 밥을 얻어먹고 유유히 떠나는 마당냥이도 위풍당당하다. 친척동생이 예쁘다고 손을 내밀면 골골거리며 몸을 맡긴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 주변은 그렇지 않다. 고양이들은 사람 눈에 안 띄는 밤에 가끔 보인다. 낮에는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공터쪽 풀숲이 이리저리 자란 곳 사이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듯 하다. 깜냥이도 그곳에서 나오는 걸 봤고 몸집이 커다란 치즈도 그 근방에서 보인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내가 길냥이 밥을 주다 눈에 띄면 나와 고양이 둘다 어떤 위협을 당할지 뻔하다. 나는 이미 몇 번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사람을 경계하고 나와 거리를 좁히지 않는 고양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나 또한 거리를 좁힐 마음이 없다. 거리를 좁히면 어떤 악의에 노출될지 알수 없는 일이다. 길고양이 관련 범죄는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허겁지겁 사료를 먹다가 사람들 발소리만 들려도 도망가는 깜냥이가 그런 범죄에 노출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진도 찍지 않고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이 근방에 사는 동안만이라도 살아있기 바란다.


길냥이들을 주기적으로 돌보고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TNR(Trap Neuter Return)을 하는 캣맘/대디들이 대단하다. 가끔 자동급식기나 밥자리가 놓여있는 것을 보면 그곳 고양이들의 건강을 빈다. 나는 쉽게 용기내지 못한 일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에 비해 내가 하는 일은 무척이나 작다. 어쩌면 내가 주는 식사를 기다리는 고양이들에겐 나의 태도가 가혹할지 모른다. 잘 해주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죄책감이 드는 순간이 많다. 특히 날 발견하면 경계심이고 뭐고 내던진 비썩 마른 고양이가 내가 준 캔을 순식간에 먹어치울 때면.




하지만 안 하는 것 보다는 하는 것이 더 나을거란 생각으로 집을 나선다. 밥자리를 치우러 갈 때 깨끗해진 밥그릇을 보면 마음이 놓인다. 내가 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좋은 밥을 주려고 한다. 언젠가는 이 아이들이 길가에 무심히 돌아다녀도 악의에 노출되지 않고 살수 있는 날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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