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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Oct 03. 2018

스무 번째/ 바깥 세상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았어?

5일 동안의 연휴. 후기.

22일.

데이트를 했다. 여느 주말 데이트와 비슷하지만 차 밀릴 것이 걱정되어 멀리 나가지 않았다. 직장 동료에게 추천받은 어느 고즈넉한 정원에서 산책을 했다. 곳곳에는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이 많아보였다. 나같이 데이트를 나온 사람들도 있고. 사람들 구경을 좀 하며 조용한 산책길을 걸으니 참 평화로웠다.오늘의 평화가 연휴 내내 이어지기를.


저녁은 근처 횟집으로 향했다. 사이다 한 병에 전어구이와 대하구이를 먹었다. 마침 요즘이 철이라서 맛있다고 했다. 애인은 대하만 먹자는 나에게 전어를 권했다. 오늘 하루 최고의 선택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전어는 내장까지 맛있었다. 나는 연신 이곳에 오길 잘 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전어철이 짧으니까 다음에는 가족들과도 한번 오고 싶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날이 추워져 따뜻한 가디건을 한벌 샀다. 데이트를 마무리하며 애인과 메로나을 하나씩 입에 물고선 그날 있었던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23일.

오래간만에 대청소를 했다. 오전내내 이불을 빨고 온 집안을 쓸고 닦았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으려고 집을 나섰는데 연휴 동안 쉬는 가게가 많았다. 추석 무렵이라 송편을 먹을까 했지만 떡집들도 휴무였다. 추석 연휴의 도시는 이렇게 텅 비어가는구나. 처음 알았다. 평소대로라면 바깥바람은 커녕 거실에서 허리 펼 새도 없이 명절음식을 만들고 있었을 테니까. 텅빈 도시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동네는 원래 일요일이면 대부분의 가게가 닫으니 크게 신경쓰일 일도 아니다. 그저 요즘 언니네 꾸러미에서 1인 꾸러미를 받아서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중이었는데 이번에 받은 밤이나 삶아 먹어야지 싶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시간을 잘 맞추 삶은 밤은 참 부드러웠다.




24일.

명절에 제사를 가지 않고 모이는 모임이 있다고 해서 서울을 가게 됐다. 오기 전 여기저기서 비난을 많이 받아 마음이 위축됐었는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니 설렜다. 비록 내가 사는 지역에는 기차가 없어서 기차가 지나가는 지역으로 이동하고, 가기서 다시 서울로 가는 여정이 기나길었지만. 도착해서 이곳저곳을 돌아보니 텅 빈 서울이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늘 사람 없는 곳에서 살다가 서울에 오면 활기찬 한편 여기저기 치이는 기분이 들어 피곤했거든.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이렇게나 한적한 풍경이라니. 그리고 문연 곳이 거의 없다니. 주말 우리 동네 같았다. 그래도 오후가 되니 사람들이 다시 북적북적 늘어나고 도로에 차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여기가 내가 평소 알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임도 즐거웠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서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지지받는 일은 행복한 경험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찝찝함과 묘한 죄책감, 부채감 같은 것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이런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내 탓이 아닌데도 내 탓인지 돌아봐야하는 자기검열이 지긋지긋하며 슬퍼지기도 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서 하행선을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터미널에서 다시 내가 사는 도시로,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도착하니 벌써 열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나올 땐 아침 8시 전이었는데 당일치기 참 고되구나.




25일.

어제의 여파인지 하루종일 자극적인게 당겼다. 아침으로 먹은 건강한 밥상으로는 나의 식욕이 풀리지 않았다. 이제 가게들도 열기 시작하는지 대부분의 가게는 영업을 시작했다. 참다 못해 오후에서야 집에서 뛰쳐나왔다. 떡볶이 가게에서 순대떡볶이와 튀김을 단숨에 해치웠다. 입가심으로 카페에 가서 버블티를 주문하는데 카페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온동네 사람 여기 다 모여있나 싶었다. 예전같았으면 나는 그제야 외갓집에서 외할머니야 화투치고 있을 시간이겠지. 가족들은 뭐 하고 있나 싶었다.


무얼 할까 잠시 고민하다 교외에 있는 한적한 절이 떠올랐다. 가는 길에 구절초도 예쁘게 피어있고 절도 고즈넉해서 산책하고 석양을 보기에도 딱이다. 처음 들어본다며 망설이는 애인을 설득해서 그곳으로 향했다. 원래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인데 명절 연휴라 그런지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애인은 절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는지 이런 예쁜 장소를 아는 나의 안목을 몇 번이나 감탄스러워했다. 토요일에 애인이 전어구이의 신세계를 소개해줬는데 오늘은 내가 신세계를 알려준 기분이었다. 석양을 보고 날이 어두워지자 맥주가 고팠다. 내일도 쉬는 날이니 이렇게 좋은 타이밍이 없다.


명절 연휴라 사람이 많지 않을 줄 알았는데 초저녁부터 술집들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동네에 산지 나름 오래됐는데 이렇게 술집이 잘 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너무 신기해하는 날 보며 애인은 원래 명절 연휴가 술집 대목이라고 했다. 정말?? 다들 나처럼 시골에 콕 박혀서 하루종일 전부치고 저녁엔 친척들 술자리에서 안주서빙하고 그러는거 아니었어? 애인이 나를 어쩐지 애잔한 눈으로 본다. 아니 애잔한 사람은 따로 있지. 이번 명절도 근육통과 불면증에 시달렸을 내 동생과 엄마. 이렇게 즐겁고 신나는 명절 역할기대에 봉사하고 착취당하고 있잖아. 그토록 날 비난하며 기대충족을 요구하는 엄마는 지금 나를 생각하며 어떤 기분이 들까? 엄마는 엄마가 생각하는 당연한 기대를 수행하면 행복할까?




26일.

연휴 마지막 날이다. 그러나 괜찮다. 목요일, 금요일 이틀만 일하면 다시 주말이니까. 늦잠을 자고 아점으로 빵을 세게나 후루룩 먹은 뒤 오늘 하루는 침대행이다. 겨우 양치만 하고 씻지도 않고 보내는 게으름은 정말 행복하다. 연휴가 이거 밖에 안 되는게 정말 아쉬웠다. 늘 이런 연휴라면 나는 명절이 정말 반가울 거다.



나오기 전 가족 간의 갈등도 있었고 주변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많이 됐다. 그런데 명절 연휴 전의 날카로움 만큼 연휴 뒤엔 이상하리만치 아무 일도 없었다. 행복한 연휴를 보내서 다른 이들의 시선이 아무렇지 않을 만큼 마음이 넓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명절은 명절답게 앞으로도 행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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