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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Sep 23. 2018

열여덟 번째/ 주말 미션 처리하기

마음껏 게으르게 살기 위해서는

주말의 낙은 역시 늦잠이다. 잠을 충분히 자고 일어나면 기분좋은 뒹굴거림을 마음껏 해도 된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창을 열어두고 잤더니 솔솔 불어오는 바람과 창 틈새로 보이는 맑은 하늘이 내 마음도 살랑살랑하게 만든다. 뭐 즐거운 게 없나 하고 주중 내내 밀린 웹툰도 보면서 물 한잔 마신다.


늑장을 부리다 보니 배가 고프다. 귀찮은 아침을 간단하게 처리할 김부각도 아작아작 씹으면서 집에 식사할 거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론 집에 김도 있고 스팸도 있고 채소 몇 가지가 있으니 볶음밥이라도 해먹을 수 있지만 주말에 차리고 치우고 야단법석 떨기 귀찮다. 집 근처 중화요리점에서 푸석한 얼굴로 애인과 볶음밥을 먹고 다시 집에 들어왔다.


집에 오자마자 이닦고 손발을 서둘러 씻은 다음 다시 침대에 누웠다. 배까지 채운 몸은 더더욱 늘어진다. 아무래도 어제 당일치기로 다녀온 여행이 내 몸을 더더욱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애인의 까치집 같은 머리가 떠오른다. 그도 어제 많이 피곤했지. 어제 그렇게 놀러다녔으니 그럴만 해.




낮잠을 좀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방바닥에 널려있는 머리카락을 발견한다. 아 외면하고 싶다. 방문 너머 내 소중한 6인용 테이블을 바라보니 영수증, 모임때 읽기로 했던 자료, 물티슈, 가방, 간식들이 어지럽게 쌓여있다. 이번 주는 컨디션이 안 좋아 정리를 할 마음의 여유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 시간이 났지만 하고싶지 않다. 우리 집에 집안일의 요정이 있어서 뿅 하고 모두 해치워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지. 막상 시작하면 금방 끝날 일이지만 일어나기까지 마음을 먹는게 만만치 않다. 폰 메모장을 켜고 오늘 해야할 일 리스트를 쭉 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다. 더 하기 싫어졌다. 지금 시간이 1시 03분. 딱 1시 10분 되면 해야지. 11분이다. 15분 되면 해야지. 너무 힘들다 30분 되면 해야지. 으악 벌써 2시야! 더 꾸물대면 낮잠시간도 놓치고 집안일도 못하고 하루가 갈 것 같다. 얼른 일어나 이불부터 세탁기에 집어 넣었다.




주말동안 계획한 집안일 리스트

가구 위, 화장대, 냉장고 위 등등 평소에 잘 안 건드리던 선반들을 닦는다. 바닥 먼지들을 청소기로 모두 없앤 뒤에 물걸레로 한번 닦아낸다. 금요일부터 바닥 청소를 안 했더니 아주 까맣게 묻어난다. 청소하다보니 쓰레기통도 이제 쓰레기를 토해내고 있는 지경이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쓰레기들도 모아 놓으니 20리터 짜리 종량제 봉투가 한가득 찬다. 종이 쓰레기들도 정리해서 한쪽에 쌓아둔다. 있다가 저녁 산책할 때 버려야겠다.


화장대를 청소할 때 보니 화장용 브러쉬들도 세척해야겠다. 꼼꼼하게 씻어 말리면서 보니 어지러운 하부장이 눈에 들어온다. 맞다 이것도 하기로 했지. 티슈와 물티슈, 발 닦는 수건들, 각종 소모품들을 택배 오는 대로 쑤셔놨는데 찾을 때마다 힘들었다. 꺼내기 쉽게 재배치하고나니 기분 좋다. 없는 물건들을 확인하고 폰 메모장에 적어 놓았다. 간단한 건 내일 퇴근길에 사다 놓아야겠다.


이제 영수증 정리를 할 차례다. 모임에서 총무를 하고 있어서 비용처리할 부분은 계좌이체를 하고 장부에 내역을 적었다. 이번주 동안 쓴 내 생활비도 가계부에 다시 정리한다. 이번 주는 뭘 그렇게 많이 사먹었는지 다음주엔 식비 정비를 해야겠다 생각을 하며 시간을 확인해봤다. 벌써 세시 반이다. 이불빨래가 다 되어 건조대에 널고 침대에 다시 벌러덩 누웠다. 새이불을 꺼내는 일이 너무 귀찮다. 잠은 다 깼는데 아까보다 몸이 더 찌뿌둥하다. 겨우 한시간 반 바쁘게 움직였다고 이렇게 힘들다. 게다가 하다보니 생가보다 일이 많아서 계획한 것 중에 못 한것도 있고 적지 않았지만 해둔 것도 있다.




그래. 이렇게 힘들땐 차를 마셔야지. 날도 제법 선선해져서 따뜻한 차의 계절이다. 동생이 여행 다녀왔다 선물해 준 차를 마시려고 찾아보니 잎차다. 필터에 우려내야겠는데 다기만 있고 필터가 없다. 벌써 다 썼나보다. 이것도 내일 퇴근길에 사와야겠다. 대신 필터가 필요없는 달달한 핫초코로 노선을 바꿨다. 여름휴가 때 여행지에서 단걸 좋아하시는 아빠 몫으로 한통 사는 김에 내 것도 샀던 거다. 포트에 물을 끓이고 내가 좋아하는 머그 잔에 핫초코를 부었다. 향이 달달해서 행복하다. 아까 테이블을 청소해 두길 잘 했다.


마쉬멜로 동동 띄워놓은 핫초코가 최고다.

핫초코 한 잔 하면서 노닥노닥 집 풍경을 보는데 아까보다는 편안하다. 집안일은 안 하면 심란함과 언젠가 해야한다는 압박감이 산더미인데 해두면 이렇게 뿌듯하다. 방문 틈 사이에 껴 있는 머리카락이 안 보이는 것도 마음이 편하다. 물론 저녁에 머리를 감고 한참 말리고 나서 다시 머리카락을 치우려고 확인해보면 어느새 틈새에 껴있는 머리카락을 다시 발견하며 한숨을 쉬겠지만.




혼자 사는 일상에서 나를 돌보는 몫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바쁠 때는 놓치기도 하고, 시간이 있어도 귀찮은 일이고, 마음껏 게으름 피울 시간을 줄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수고로움 덕에 내 공간 안에서 편안함를 느끼기도 하고 휴식하고 고된 바깥 일들을 잊기도 한다.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수고로움이 늘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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