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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Sep 09. 2018

열다섯 번째/ 낭비하는 게 좋아

돈을 더 쓰면 어때

지인들이나 가족을 초대할 때면 내 생활습관이나 소비습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곤 한다. 어떤 면에서는 신기하다는 듯, 어떤 면에서는 좋아보인다는 듯, 또는 어떤 면에서는 그런 삶의 습관이 낭비가 아니냐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선 그럴 수 있다. 혼자서 생활하고 한정된 자원 안에서 삶을 꾸려나가려면 쓸 곳에는 쓰고 아낄 곳에서는 단호히 아껴야 한다. 나는 그 기준이 그들과 다를 뿐이다.


욕실을 살펴보자. 나는 두루마리 휴지를 쓰지 않는다. 한켠에 각티슈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두루마리 휴지보다 각티슈가 부드럽고 자극이 덜하다. 라벨링이 되지 않아 집에 하루 묵는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이런저런 용기 안에는 천연 비누나 바디솝이 있다. 자주 씻는 습관이 있는데 자극이 덜한 재료를 쓰는게 내 피부에 편안하다. 혼자 살다보니 나만 구분하면 그만이고 누가 오면 욕실에서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샤워기 줄과 샤워헤드도 내가 원하는 것으로 직접 갈았다. 간단한 공구를 갖춰놓은 보람이 여기에 있다.


거실 겸 주방에는 6인용 테이블과 벤치 의자가 있다. 거실에 있는 것 중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물건이다. 이걸 구입할 때 엄마는 혼자 사는 집에 이렇게 커다란 걸 들여 놓는다며 한 마디 보태셨다. 그러나 내가 사는 집인걸. 여기 앉아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누워있기도 한다. 손님이 오면 다같이 둘러 앉아 이야기도 할 수 있다. 식기나 커트러리류는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나 작가가 만든 것으로만 채웠다. 요리는 가끔 해먹지만 예쁘게 담아놓으면 마음이 행복하다. 우리 집에서 가전이나 아이폰 빼고 가장 비싼 전자기기일 블루투스 스피커는 조금 무겁긴 해도 베이스 음이 둥둥 울리는 소리가 마음에 든다. 냉자고 안에는 항상 제철 과일이 있다. 다른건 몰라도 제철 과일은 항상 집에 두고 먹는다.


방으로 들어오면 침구가 모두 세트 구성이다. 나름 몇십 만원의 거금을 주고 구입했는데 사계절 내내 부드럽고 편안하다. 가끔 침대를 큰 걸로 살걸, 그래서 베개나 바디필로우를 사 둘걸 하는 아쉬움이 들긴 한다. 수건은 모두 두툼하고 부드럽고 같은 색으로 한 번에 구입했다. 가끔 선물로 수건이 들어와서 내가 쓰는 수건과 섞이는 일을 가장 싫어한다. 그런 수건은 보통 욕실 앞 발수건으로 이용한다. 닭갈비집 개업이라고 크게 박힌 수건을 정리함에 넣고싶지 않다. 집주인 사장님의 취향일 듯한 정원이 그려진 집 그림이 있는 블라인드도 과감하게 떼서 베란다에 뒀다. 대신 전동드라이버로 핑크색 암막커텐을 달았다. 내가 이 집에서 잘한 일 베스트5 안에 당당히 들어간 일이다.




이런 모든 일들이 낭비고 겉멋이고 허영이라면, 아는 낭비를 좋아하고 겉멋 들고 허영심이 가득 찬 사람이다. 뭐 어때. 이걸로 내가 행복하면 그만 아닌가?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을 하나씩 내 취향대로 바꿔나갈 때면 희열감이 든다. 욕실에서 원하는 수압으로 샤워를 하고 잘 개둔 수건으로 몸을 말리며 나올때 얼마나 행복한데. 달고 맛있는 과일을 꺼내 예쁘게 잘라 좋아하는 식기에 담아놓고 테이블에서 음악을 들으며 먹을 땐 콧노래가 나온다. 베란다 창을 열어두고 쏟아지는 햇볕과 바람을 맞으면서 보송한 침대에서 즐기는 늦잠은 최고다.


물론 모든 면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다 누리고 살 수는 없다. 나는 겨울날 난방비가 10만원이 넘을지언정 여름날 냉방비가 2만원도 채 나오지 않는다. 겨울의 난방비를 듣는 사람은 뭘 그렇게 많이 쓰냐고 하고, 여름의 냉방비를 듣는 사람은 너만 누진세가 피해가냐고 묻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갖추는 대신 내가 굳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들은 모두 버리거나 쓰지 않은 방식을 택할 뿐이다. 내 모든 옷가지들은 옷장 한 개, 선반 두 칸에 모두 들어갈 만큼 단촐하다. 내 집에 온 사람들은 생각보다 단촐한 물건의 가짓수에 놀란다. 방 하나, 거실겸 주방 하나, 욕실 하나, 베란다 하나의 작은 집이 텅 비어보인다고 신기해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낭비를 하는 나도 나고, 물건을 거의 늘리지 않아 비워두는 나도 나다.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삶과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깔끔한 원피스를 차려입고 잘 세팅된 차림으로 소개팅에 나가면 그모습 그대로 나를 판단하는 상대처럼, 나의 단편적인 일상으로 보는 남들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를 낭비한다고 바라보면 나도 웃으며 “인생 즐길건 다 즐기고 죽어야죠.”라고 대답할 뿐 내가 그걸 구구절절 설명하고 이해받을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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