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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Sep 13. 2018

열여섯 번째/ 전 부치기 파업할래요.

명절 혼자 보내기 계획중

언니 정말 안 갈거야?

“아직 엄마에게는 정식으로 이야기 안 했어. 하지만 계속 안 가겠다고 했으니 어느 정도 눈치는 채셨을 거야. 저번 추석에도 안 갔잖아.”

“이번에 여행 갈 거야?”

“아니. 그냥 집에 있을래.”


이번 추석은 파업이다. 일년에 한두번 볼까 말까 하는 친척들 명절이라도 봐야하지 않겠느냐는 부모님의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특히 아빠는 탐탁치 않아할 테지. 엄마는 긴 연휴 동안 코빼기도 안 비칠 딸에게 서운하지만 그래도 가자 소리는 안 하실 것 같다. 동생은 함께 고통을 나눌 동지가 없어지는걸 아쉽겠지만 그래도 오란 소리는 하지 않았다. 같이 있을래? 라고 물어보니 자기는 그래도 가겠다고 했다.




저번 설날에는 네 시간 동안 전을 부쳤다. 전을 부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 빼고, 대형 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전을 부쳐낸 시간만 네 시간. 전 부치는 시간만 그정도인데 명절 내내 매 끼니를 준비하고 치우는 일, 술상을 준비하는 일... 그 고된 노동은 어느정도일까? 나는 그나마 슬쩍 농땡이 피워도 눈치가 덜 보인다. 그러나 엄마 포함 이 집안 며느리들은 입장이 자르다. 그분들은 명절이면 새벽 여섯시에 기상해서 밤 늦게까지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 어쩌다 조금 늦게 일어나기라도 하면 눈치도 그런 눈치가 없다. 매년 명절마다 반복되어 온 일이다.


그 고통스러운 명절을 꾹 참고 버틴 이유는 오로지 엄마 때문이었다. 나는 엄마가 명절 당일 친정에 가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언젠가 딱 한번. 그래도 설날이 지나기 전 친정에 가서 세배를 하고 싶다는 엄마가 온 친척의 눈치와 아빠의 침묵을 무시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날 밤 열시에 굳이 본인이 운전대를 잡고 출발하여 온 가족을 위협하던 아빠의 폭력을 잊지 못한다. 울컥하는 마음을 꼭 붙잡고 그 폭언과 거친 운전 사이에서 숨을 죽이던 그날의 침묵을,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엄마는 그 이후로 단 한번도 명절 당일 친정에 가자고 하지 않았다. 나도 엄마에게 언제 외갓댁에 갈 수 있냐고 조르지 않았다.


요즘엔 명절에 여행을 가는 집도 있다고 하고, 외식을 하는 집도 있고, 음식을 어느정도 사서 노동을 해결하는 집도 있다고 들었다. 그렇게 들어보긴 했는데 실제로 내가 겪어본 명절에서 아빠 쪽 집안 어른들이 그런걸 시도하는 건 본 적이 없다. “다들 연세 있으시니까 점점 줄어들거야.”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말씀은 별로 위로가 되지도 않는다. 그렇게 들은지 십년은 된거 같은데 아직 이모양 이꼴이다.




명절에 빠지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해왔다. 나 혼자 이 지옥도를 빠져나가기엔 양심에 걸렸다. 와서 먹고 쉬기만 하는 아빠는 전혀 신경이 안 쓰이지만 친정에 가면 죽은 듯이 잠만 주무시는 엄마를 빼오고 싶단 생각은 많이 했다. 그러나 손주를 보신 큰어머니들도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시는데 거의 열 살 넘게 차이가 나는 동서인 엄마가 명절에 빠지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며칠 편하자고 삼십년의 관계에서 불편함은 피하고 싶단 이유로 그렇게 노동착취를 당해온 거다. 그리고 엄마 자신도 이미 그 상황에 너무 익숙해져서 “우리 세대엔 어쩔 수 없지..”하고 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이상 그렇게 하고싶지 않다. 엄마에게 따로 용돈이라도 더 챙겨드릴지언정 이 고통을 함께하고 싶지는 않다. 매우 이기적인 결정이지만 나는 엄마 빼고는 그 누구에게도 미안하지도 아쉽지도 않다. 내가 양해를 구할 대상도 엄마면 족하다. 미성년 때부터 무료봉사하면 되었지, 딸이라는 이유로 불편하게 전전긍긍 눈치보고 싶지 않다. 명절 날 여자들의 희생으로 근근하게 이어오는 폭력적인 평화에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어 넘기기도 이제는 지쳤다. 그럼 내가 나서서 이 문화를 바꿔보라고? 당장 아빠 하나의 의견도 못 바꾸는 마당에 친척들을 설득하는 건 가능할까?



사실 작년 추석에도 나는 명절행사에 가지 않았다. 나는 그때 아주 재미있는 지점을 발견했는데, 친척 어른들 대부분이 나의 일탈을 인정했다는 거였다. 이미 친척언니의 선례(?)도 있었고 한참 인생을 즐길 때인데 젊은 사람에게까지 강요할 필요가 있냐는 거였다.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 나는 노후하신 친척 어른들도 평화와 안녕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그 인자한 마음이 이집안 며느리들에게도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같은 찌끄래기는 그냥 “앞으로도 잘 피하면 되겠네...”라고 말할 뿐이었지만.




막상 이번 주말에 미리 가족들을 보러 가는 길이 편하지만은 않다. 그냥 삼사일 죽었다고 생각하고 꾹 참다 올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지긋지긋했던 올해 설날의 풍경이 다시 몰려온다. 비겁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냥 용돈 봉투나 두둑하게 챙겨야지 할 뿐이다. 이 날을 위한 예쁜 용돈 봉투도 준비했다. 한 편으로는 내가 죄책감 가질 일이 아닌 곳에 과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가해자는 따로 있는 판에서 동지를 버린 피해자가 가지는 부채감 같은 거다. 명절이 아니라 암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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