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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방인

가족과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

by 온도
올해 여름 휴가는 늘 그랬듯이 산속 계곡이었다. 예약한 펜션이 만족스러웠고 그곳에 묵는 내내 특별한 일정이 없이 쉬고 간식을 먹으며 여유있게 보냈다. 오는 길에는 여유 있게 산 경치를 보았고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평화로웠고 작은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가족 모두 만족했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벌써 가니?”

“저도 이제 집에 가서 짐도 정리하고 쉬어야지요.”

“내일도 쉬는 날일 텐데 하룻밤 자고 가지.”

“아니에요. 다음 주 생일이니까 그때 다시 올게요. 엄마 아빠도 쉬세요.”


부모님 얼굴엔 서운한 기색이 보였다. 2박 3일 내내 꼭 붙어있었지만 저녁도 먹기 전에 간다는 딸이 아쉬우셨나 보다. 나도 가족과 있는 것이 싫은 것도 아니고 급하게 가야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편하게 쉬고 싶고 나도 여행의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부모님 댁은 부모님 댁이고 나는 이곳에선 손님일 뿐이니까.


집에 돌아오니 텁텁한 공기가 나를 맞았다. 겨우 2박 3일 비웠다고 이렇게 티가 나다니.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서큘레이터를 돌렸다. 짐을 정리하고 여행가서 입었던 옷을 세탁기 돌린 후 집을 둘러보니 며칠 사이에 먼지도 쌓여있다. 한참 청소를 하고 다시 빨래를 널고 나니 땀이 났다. 샤워도 하고 침대에 누우니 이제 살것 같았다. 내 집이 제일 편하다!




스무살, 대학을 집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게 되면서 가족과 떨어져 살았다. 초중고를 한 동네에서 다닌 나는 대학교 만큼은 멀리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학교 기숙사에서 집으로 가려면 버스를 타고 30분을 걸려 시외 터미널에 가야했다. 다시 터미널에서 부모님 있는 지역까지 2시간, 버스에서 내려서 다시 부모님 댁이 있는 버스로 30분을 가는 대장정이었다. 그 중간 중간 기다리는 시간도 있고 배차 간격도 있으니 못해도 네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거의 매주 주말마다 부모님 댁에 갔다.

그때는 가족과 떨어져 생면부지의 또래들과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다. 나는 한 동네에서 초중고를 모두 다녀서 학년이 올라가도 늘 아는 얼굴이 있었다. 그런데 대학교는 달랐다. 아는 얼굴은 커녕 동향에서 온 사람조차 찾기 힘들었다. 게다가 또래들과의 공동생활에 사생활은 거의 없었다. 부모님은 혼자 보낸 딸이 자취보단 기숙사 생활을 하는게 안심되셨겠지만 정작 나는 어디에도 정 붙일 데가 없어 우울증과 수면장애로 고생했다. 몸무게는 10kg 가까이 빠졌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도 내 자리가 사라져 갔다. 처음에는 서로 떨어져서 산다는 사실이 참 애틋했다. 가족들은 내가 찾아올 때마다 반가워했고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채워주었고 나의 학교 생활을 물었다. 대학교 생활 내내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한 달에 한번 잠깐 왔다 가는 지금도 가족들은 나를 반긴다. 다만 삶이 달라졌을 뿐이다. 나도 가족들도 서로가 없는 일상이 당연해졌다.




졸업을 하고 취업 준비를 하던 2년 동안은 부모님 댁에 살았다. 가족들도 나도 최악의 2년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삶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하루에 몇 번씩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고시원을 검색하곤 했지만 사실 그럴 만한 돈조차 없었다. 나는 너무 우울했고 부모님은 나를 이해할 수 없었고 동생은 터질듯 말듯한 이 관계를 불안해 했다.


취업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내가 모은 비상금 전부와 부모님께 빌린 돈을 보증금 삼아 월세살이를 시작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다른 지역으로 취업한 내가 부모님 댁에서 출퇴근 하기 어렵다는 거였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직장을 부모님 댁 근처로 옮기더라도 함께 살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 다시 혼자 사는 것은 녹록치 않은 일이었지만 가족과 사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게 적응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평화를 얻었다. 나 또한 혼자 사는 지금에 만족하고 있다.




나는 우리 가족의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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