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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Nov 09. 2018

나는 가정폭력 생존자 입니다

아직 작은 아이로 머물러 있는 나에게

결국 가족의 이야기였다.


이전에도 정신과 진료와 상담의 경험이 있다. 재미있게도 늘 익숙하면서, 늘 새롭다. 십년 전 처음 정신과를 갔을 때의 절박함과 지난 달 처음 상담센터의 문을 두드렸을 때의 떨림은 토할 것처럼 괴롭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던 이야기들이, 수치를 재고, 검사도구를 들이대고, 이야기가 깊어지면서 굳어가는 그들의 표정도 익숙하다. 상담 선생님은 늘 울 것 같은 얼굴로 눈이 벌개진 채 나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제는 거의 지나가버린 이야기들에 나도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싶다. 몇 번이나 반복해온 이야기를 이제는 끝내고 싶다. 하지만 꺼내들 때마다 괴롭고 처음 하는 이야기 같다. 매번 도망을 치는 지점도 비슷하다. 그래, 가족의 이야기다.


나는 가정폭력의 생존자다. 나는 그 중에서 운이 좋게도 밥을 굶지 않았고, 자주 맞지도 않았고, 형제와 부당하게 비교당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폭력의 위계를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릴 적 보던 드라마 <허준>에서 지금까지도 깊게 기억나는 대사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병이 가장 고통스럽고 중요한 줄 안다고. 나도 그럴지도 모른다. 은밀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진행됐던 나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폭력으로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다 너 잘 되라고 한 거겠지.", "그래도 그 덕에 니가 엇나가지 않고 컸잖아.", "부모도 사람이야. 그 시대 사람들은 잘 몰랐을 수도 있어." 이런 말들은 내 입을 닫게 하고 내 아픔을 수치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성인이 된 나는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됐다. 잘 지내다가도 어딘가 무너지곤 했다.

 



외면하고 싶다. 상담을 다니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고통을 다시 꺼내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다.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다. 그러면서 내가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이유, 공포심을 가지는 이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도 혐오스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이번에 도망치면 정말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살고 싶다.


그런 과정에서 꺼내드는 이야기들이 있다. 나는 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먹는 것을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맛의 즐거움을 누구보다도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유난히 식사시간에 먹는 밥은 잘 넘어가지 않는다. 그 자리를 나는 간식으로 채우곤 한다. 나는 내가 밥보다 간식을 더 좋아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 깨달았던 지점이 있다.


아버지는 늘 집에서 식사를 했다. 모임에 거의 나가지도 않았다. 회식 자리에 가서도 1차 자리만 끝나면 음식점 앞으로 엄마를 불러 데리러 오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금전적 여유가 없었던 집안 형편상 외식도 거의 없었다. 모든 것은 엄마의 노동력으로 채워졌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입맛은 매우 까탈스러워서 엄마는 지금도 찌개나 국 한 가지, 반찬 한 가지는 매일 새로 준비한다. 엄마가 전업주부냐고? 아니다. 엄마는 파트타임 노동자다. 까탈스러운 아버지의 입맛을 맛추기 위해 매일을 고군분투하는 엄마. 그 아래서 자라난 나. 얼마나 화목한 가정이었을까?


아버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매일 그날의 밥상을 품평했고 아버지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날의 식사 분위기는 고문 그 자체였다. 아버지의 입맛에 맞추지 못한 엄마를 성토하며 본인의 자식들이 엄마를 함께 비난해주길 원했다. 내가 입맛에 맞다고 대답하면 니들끼리 합심해서 엄마 편을 드는 못된 년이 되었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의견도 없는 멍청이가 되었다. 아버지의 입맛에 맞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뉴스를 보면서, 갑자기 떠오른 궁금함이 있을 때 우리는 아버지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야 했다. "모르겠다."는 답은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스마트폰이야말로 우리 집을 위한 상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바로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고, 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반박할 수 있는 정보들이 넘쳐나니까. 하지만 어린 시절, 그런게 있을리 없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대로 꼬투리잡는 아버지의 폭언과 모멸적인 시간이 나의 식사시간이었다. 벗어날 수도 없었다. 나는 고작 어린 아이일 뿐이었다.


내가 최대한 할수 있는 일은 한 가지였다. 최대한 밥을 적게 먹어서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 식사 시간이 짧아진다고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고통스러움을 줄일 수는 있었다. 부족한 양은 나중에 먹으면 되는 일이다.  그 자리에서 나를 보호해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우습게도 엄마 또한 결혼생활 30년이 넘은 지도 아버지와 겸상을 하지 않는다. 뭔가 부산스럽게 나머지 준비를 하며 아버지의 밥 시중을 드는 척을 하다 아버지가 밥을 거의 다 먹을 때 쯤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한다.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우리 집에 아버지 밖에 없다. 그 습관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남성과 밥을 먹을 때, 또는 처음 보는 사람과 밥을 먹을 때는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못한다. 내가 만족할만한 양을 먹으려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충분히 안정되고 난 뒤여야 한다.




아버지가 나에게 폭언과 공포로 양육했다면 엄마는 나를 불안으로 양육했다. 엄마는 많은 가정의 엄마들이 딸에게 바랐듯이 '능력 있는 여성'이 되길 바랐다. 아버지의 폭력과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독립을 하고 빨리 자기 몫을 하기 바랐다. 엄마는 아버지로부터 나를 적절히 보호해주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고, 오히려 아버지의 정신계 공격에 몸과 마음이 먹혀버린 사람이었다. 하지만 딸은 그렇게 살지 않기 바랐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가지 더 바란 것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 되면 자신의 인생도 바꿔주길 바랐다.


모녀의 관계는 단추가 잘못 되어 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나는 엄마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 당시에 엄마는 성인이었지만 가정폭력의 피해자였고, 나를 안타깝게 여겼지만 한편으로는 가정폭력 가해자가 되었다. 엄마는 늘 스스로가 매우 불쌍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불쌍한 자신을 자식이 외면하지 않기를 바랐다. 딸에게 공부 이외의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니 인생은 바닥 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나의 삶을 찾으려고 하면 술에 취해 울면서 자신을 조금만 이해하라고 했다. 같은 피해자로서의 동질감이었을까. 나는 엄마가 너무 불쌍했고, 결국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의 영향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쪽짜리 어른으로 한참을 살게 됐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해의 기억이 강한 아버지와는 달리 엄마는 나에게 가해자이면서도 비슷한 폭력에서 생존해왔다는 이유로 선을 긋기가 어려웠다. 부탁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그렇게나 불쌍한 자신을 봐달라는데. 딸로서, 같은 여성으로서, 그 인생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가족으로서 외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 그 사실을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다. 혼자만 탈출한 나는 비겁한 사람이 되어야 했고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삶을 바꿔줄 만큼의 능력도 여유도 없다.


내가 지금까지도 가정폭력에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나는 소위 '탈가정'한 사람이고 내 부모로부터 어떠한 지원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한 나의 부모가 나의 경제력과 멀어질까, 연을 끊으면 자신들이 더 손해일까 전전긍긍해 하는 모습에 가깝다. 그런 모습이 한 편으로는 역겹고 혐오스러울 때도 있다. 내가 약하고 힘이 없을 때는 자기 멋대로 굴던 사람들이, 내가 힘이 생기고 나서는 전략을 바꾸고 있구나. 내가 언제까지 그들의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로 본인들 뜻대로 굴러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또는 내 부모가 이렇게나 작은 사람들이었나 새삼 생각하게 됐다. 어릴 적 나를 통제하고 가두던 사람들은 정말 보잘 것 없는 어른들이었다.




늘 고통스러운 일만 반복되지는 않았다. 나름의 추억도, 좋았던 일들도 존재한다. 내가 온전히 그들을 놓지 못하고 끌려왔던 건 학대 속에도 주어진 당근 때문이겠지. 그렇게 달지도 맛있지도 않지만 내가 그나마 정이라고 느낄수 있는 그런 것들. 내 부모도 나름의 애정으로 나를 대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애정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애정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나에게 애정인 적 없었다. 내가 좋아하지도 먹지도 않는 음식을 바리바리 싸다 주는 것, 내가 싫어하는 등산이나 캠핑을 데려가며 추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내 사소한 일상까지 통제해 가며 너를 위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 나의 진로를 마음대로 설정해 두며 그게 본인들의 최선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 나는 그들에게 늘 소리쳐 왔다. 그게 어떻게 사랑이야? 자신들이 받고 싶은 걸 주는게 사랑이야? 그건 다 자기만족이잖아. 그렇게 살아서 내가 이만큼까지 잘 살지 않냐고? 이게 잘 사는 거 같아? 남들 보기에 잘 살면 뭐해 나는 맨날 죽고 싶은데. 단 한 번도 제대로 닿은 적 없었고, 그들은 항상 나를 탓했다. "어디 버릇없게 '감히' 나에게 그럴 수 있어?"라면서.


그러나 매우 우습게도, 어릴 적 형성된 관계는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나에게 별다른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존재인데도 나는 세뇌된 채로 행동하는 일이 많다. 사회의 인식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너의 부모인데, 그래도 그 덕에 니가 잘 자랐잖아. 라는 말을 서슴없이 꺼낸다. 너희들은 틀렸다. 나는 나의 부모 덕에 이만큼 성장한 것이 아니다. 이 엿같은 환경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여기까지 죽지 않고 생존한 거다. 나는 지금 어른이 되었는데도 아직 힘이 없었던 아이 때처럼 부모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반응에 전전긍긍한다. 그런 내가 언제까지 학대 피해자로만 살아야 할까? 나를 죽이지도 않았고, 밥도 주고 이만큼 키웠으니, 그리고 이제 나는 내 부모보다 잘 살고 있으니, 는 '쿨하게' 그들을 용서하는 아량을 베풀어야 할까? 아직은 그럴 수 없다. 그러기에는 내 마음 속 증오 덩어리가 너무나도 크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누구에겐 처음부터 끝까지 남탓하는 소리로만 비춰질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미성년 시절의 일은 철저히 부모의 탓이 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엄마는 거실에 아버지와 나만 남겨두고 어린 동생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던 것을. 나는 엄마에게 구해달라고 문을 두드리고 긁으며 빌었던 것을. 그리고 그런 나를 뒤에서 바라보며 기다리던 아버지를. 아무도 나를 구해줄 사람이 없었고, 철저히 방임 당하고 폭행 당했던 것을. 지금의 나는 성인이다. 성인이 된 시점의 관계 설정은 나의 몫도 있고 그 몫이 작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내 부모의 전횡을 바로잡지 못했고, 나 자신에게 발목 잡힌 삶을 살게 했다. 지금이라도 이 족쇄를 끊어내고 나만의 인생을 살고 싶다. 나는 정말 내 인생을 살고 싶다. 내 안의 작은 아이야. 그러려면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널 위로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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