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생일 빅 미션 처리하기
매년 긴장되는 순간들이 있다. 1번은 명절, 2번은 어버이날, 3번은 부모님 생신. 이 세 가지 행사를 무사히 치뤄야 한 해가 무사히 지나간 기분이다. 부모님의 기대, 나의 한정된 예산, 내년에도 어김없이 돌아오는 행사의 기대치 사이에서 적정선을 찾기 위해 진땀뺄 때가 많기 때문에. 왜 이렇게 행사는 자주 오는지. 조금도 방심할 수 없다. 2월의 아빠 생신과 설, 5월의 어버이날, 9월의 추석, 10월의 엄마 생신까지. 어느 지인은 그나마 결혼 기념일과 새해, 크리스마스까지 안 챙기는 게 어디냐며 나를 위로했지만 부모님의 까다로운 성미를 맞추는 일은 이 다섯번도 충분히 많다.
2월의 아빠 생신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아빠는 첫째 딸에게 바라는 건 딱 한 가지다. 용돈. 워낙에 물건 보는 기준이 남다르셔서 뭘 사와도 좋은 소리 듣기가 힘들었다. 선물을 개봉하고 아빠의 사용기를 가감없이 듣다보면 나의 성의는 온데간데 없이 증발해버리기 일쑤였다. 매년 선물을 고를 때마다 이건 과연 어떤 소리를 들어 내 속이 뒤집어질지 상상하곤 했다. 뭐든 입으로 다 깎아 먹는 게 아빠의 특기니까. 결국 재작년부터 용돈을 드리기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아무 이야기를 듣지 않게 됐다. 올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빠 생신은 용돈을 드리고 아빠가 좋아하시는 음식점에서 맛있게 저녁을 먹은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설 역시도 조용히 흘러갔다. 아빠 생신 직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는 바람에 집안이 어수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때 까지만 해도 나는 부모님께 매달 용돈을 드렸고, 명절도 넉넉히 챙기느라 등골이 빠지는 착한 딸 코스프레를 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부모님께 평소보다 더 넉넉히 챙겨드렸다. 덕분에 내가 용돈을 드리던 때 중에 가장 기뻐하는 부모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크나큰 실수였다. 부모님은 딸이 등골이 빠지건 말건 '용돈을 더 주나보다.'하고 좋아하셨으니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쓸 때면 어떤 지인들은 나에게 "아니야. 그건 니가 오해하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게 차라리 오해였으면 좋겠다.
문제는 어버이날에 찾아왔다. 3월의 어느 날, 매달 드리던 용돈을 "기분 좋게" 주지 않는다며 엄마는 용돈을 거부하기 시작하셨다. 내 입장에서는 용돈을 기분 좋게 주는 게 힘들었다. 내 첫 월급부터 얼마를 줄 건지 할당량이 정해졌다. 적은 월급으로 월세살이를 막 시작한 나로선 큰 부담이었다. 또는 가족행사나 엄마와 집 밖을 나서 외식을 할 때면 "이건 니가 사는 거지?"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기분이 좋을 리가 있을까? 투자대비 효용을 바랐다면 나에게 한 투자는 망한 투자였다. 너무 부담되니 줄였으면 좋겠다는 말에 엄마는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한다며, '혼자 살며 혼자 쓰는 돈'이 뭐가 부족하냐며 나에게 화를 냈다. 착한 딸로 살아야 직성이 풀리던 나는 용돈을 줄이지도 못하고 끙끙대며 아등바등 살았다.
그런 역사가 있는 용돈이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용돈 받는게 기분 나쁘니 더이상 주지 말라고? 무슨 말만 하면 내가 돈이 없어서 죽는 소리 하는게 듣기 싫다고? 내가 이제까지 무슨 짓을 했나 싶은 분노와 이제까지 나와 엄마의 관계는 무엇이었는지 싶은 모멸감이 들었다. 그리고 시기도 사실 내게는 땡큐였다. 반년 후면 전세 계약 기간이 다 끝나가는데 내 통장에 있는 돈은 처음 전세계약을 했던 몇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의감이 들었다. 딸로서도 나 자신의 자립으로서도 다 망친 기분이었다. 그날부터 매달 드리던 용돈은 끝이었다.
그러고 나니 다음달부터 엄마는 난리가 났다. 문자가 왔다. "그래도 돈은 보냈어야지."라는 문장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집안 형편이 가난한데도 엄마와 기분이 상했단 이유로 챙기지 않은 나에 대한 비난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겹게 들었던 “큰딸은 살림밑천이”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 기회로 그 말이 무엇인지 크게 깨달았다. 반항 한 번 안 하고 말 잘 듣는 딸.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찍 취업을 하는 딸. 그리고 번 돈을 가난한 부모 살림과 부양에 보태는 딸. 그런게 살림밑천인 거였다. 멍청한 나는 그런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어른들의 칭찬에 뿌듯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한톨의 반항조차 제대로 못 하던 내가 엄마가 나에게 어깃장을 놓고서야 제대로 화가 났다.
나는 독립하기 전 부모님이 날 부양했을 때, 단 한번도 부모님이 베푸는 은혜를 편히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빠는 아무 때마 내게 화를 내면서 "내가 이렇게 힘든데 이러다 죽으면 넌 어떻게 해줄거냐."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부모이기 때문에 아무때나 폭언을 퍼붓고 한 톨의 미안함조차 가지지 않는게 다연했다. 엄마는 "집이 이렇게 힘든데 너 돈 좀 모아 논 거 있지 않느냐." 하며 나에게 돈을 빌려 가거나 선물을 주기 바랐다. 그리고 꼭 어른이 되면 이런 것도 해줄 거냐며 나에게 약속을 받아가곤 했다.
이게 학대라는 인식도 별로 없었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주변에서 친구들이 부모님을 졸라 옷을 샀다거나 물건을 사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딴 세상 같았다. "어떻게 부모님에게 그런 이야기도 할 수 있지?"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우리 집 형편이 안 좋구나 하고 넘겼다. 물론 우리 집이 가난한 건 맞았다. 하지만 자식이 매달 용돈을 드려야 겨우 생활이 유지될 정도의 가난함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다행히 모두 건강하셔서 경제활동을 하고 계시니까. 두 분은 성인이고 스스로의 경제력으로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내 월급의 지분이 부모님에게 있지는 않다. 부모님의 경제공동체는 부모님 자신들이지, 이미 독립해서 따로 살고 있는 나는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면서 화를 냈을 땐, 엄마의 반응이 정말 충격이었다. 진심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몇번 그랬던 적은 있어도 자주 그러진 않았다는 거다. 나는 그게 몇년도 몇월이었는지도 전부 기억 나는데.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두 권의 책을 읽었다. 가야마 미카의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나 아사쿠라 마유미, 노부타 사요코의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 였는데, 그 책에서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일화가 나와서 놀랐다. 생각보다 엄마의 영향력 안에서 정서적으로 학대당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딸들이 많았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어버이날에 용돈을 드렸다. 내가 이제까지 했던 금액 중 가장 적은 금액으로. 그리고 처음으로 나에게 부담이 가장 적은 금액으로 드린 거였다. 물론 탐탁치 않아 하셨다. 용돈도 안 주는데 돈을 이것 밖에 안 주면 어떻게 하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래도 나는 더 드릴 마음이 없었다. 다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부모의 권력에 다시 한번 놀랐다. 나는 부모님이 '형편껏' 해주면 거기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는데. 사정이 많이 어렵구나 싶었고, 나는 부모님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빨리 독립해서 내 부모에게 부담을 덜 주는 자식이 되어야만 했다. 부모님도 내게서 한 번도 불평을 들어본 적 없고 웬만한 건 스스로 한다며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다. 물론 지금 느끼기엔 그것도 정서적인 학대였다. 본인들은 아마 끝까지 깨닫지 못하겠지만. 그래서 부모님이 해줄 땐 그게 나와 맞지 않아도 군소리 없이 받아야 하고 부모님 자신은 원하는 요구를 마음대로 해도 가족이고, 부모니까 괜찮은 거다. 대단한 행복회로다.
그러다 가족 휴가 때는 엄마의 사과도 받았고, 아빠는 침묵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였으니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그래서 숙소 예약은 내가 했다. 식사도 한끼 대접했다. 좋은 숙소와 좋은 식사. 물론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닌 눈치였지만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이번에는 고맙단 말도 들었으니까.
그러다 위기는 추석에 다시 찾아왔다. 여기서 나는 두 번째 탈출을 시도했다. 부모님의 '기대'에서 벗어나서 명절에 참석하지도 않고 설보다 훨씬 적은 용돈을 드린 거다. 여기서 엄마의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용돈 봉투를 받으시자마자 내 앞에서 열어보시고 세 보시더니, "겨우 이거니? 엄마가 능력이 안 되니까 더 챙겨 줬어야지." 능력이 안 되는 걸 왜 내가 채워줘야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매달 용돈을 안 드리니 이런 날에 더 크게 쓸 줄 아셨나 보다. 그러나 이전의 내가 무리한 거지 지금의 내가 야박한 건 아니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이제껏 내 친구들 중에서 나만큼 부모님에게 돈을 많이 드린 사람이 없었다. 내 부모님을 옹호하던 주변 사람들도 내가 드린 금액을 듣고 나면 모두 조용해졌다. 아빠는 원래 엄마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시는 분이니 엄마의 언어를 통해 전해 듣자니, "이제 매달 안 드리니 더 챙겨드렸어야지." 정도의 반응이었다. 이번엔 상대하기조차 진이 빠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어찌어찌 시간은 흘러 이제 엄마 생신이 왔다. 사실 이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배가 살살 아프다. 엄마 생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이 시점, 나는 매일 상황극 또는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다. 이번에도 욕을 먹고 싶진 않은데 어떻게 해야 욕을 좀 '덜' 들어먹을까? 그렇다고 내가 이제까지 한 투쟁에 굴복해서 엄마가 만족할 만큼을 하고 싶지 않다. 결정해도 내가 주도권이 있는 상태에서 하고 싶다. 여느 때 같으면 엄마의 의사를 미리 물어봐서 엄마의 위시리스트 하나를 지워줬을 거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정한 한도 내에서 내가 할수 있는 만큼만 하고 싶다. 그 액수가 크던 적던. 이제 가족 행사나 가족 관계에서 나의 주도권은 내가 가진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이 나의 목표다. 물론 30여년간 이루어진 관계가 변화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이 관계에서 손해볼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나는 나 스스로의 삶을 꾸릴 수 있는게 좋고, 부모님은 건강한 삶을 사는 딸을 보게 되니 좋은 거니까. 나는 더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