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요즘 부쩍 엄마가 안부를 묻는다. 잘 지내라며 문자 하기도 하고, 마치 매일 만나는 사이인 것처럼 전화를 하기도 한다. 불편하다. 내가 편한 상대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엄마'라는 두 글자가 폰 화면에 뜰 때면 덜컥 긴장을 하게 된다. 왜 긴장을 할까, 생각해보니 나는 엄마를 '내 일상을 흔들어 놓는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자주, 나를 긴장으로 밀어 넣는다. 나의 행복과 안녕을 빌며 나를 안심시키다가도 어느새 바짝 곁에 붙어 부담스러운 책임감들을 깊이 얹어주곤 했다. 한 사람에게 이 두 가지 면이 다 나올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이 책임감들은 늘 버겁고, 고통스러웠다. 기대보다 적게 책임감들을 해치우거나 하지 않는 날이면 죄책감이 들었다. 또는 강요를 수용하지 않는 나를 질책하는 모습들은 내게 늘 끔찍한 일이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일까?
투자 회수금을 걷듯이 나에게 가해지는 압력들은 은근하고 내밀한 부분이라 남들에게 쉽게 말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그런 게 가장 두려웠다. 주변에 알리기 어려웠고, 알리더라도 '가족 간의 문제'는 남이 간섭하기 어려운 영역이고, 결국 '부모 자식 간'은 뗄 수 없는 존재들이란 의식은 내 입을 다물게 했다. 기쁘게 호의로 줄 수 있는 것보다 높은 역할을 채우는 일은 버겁고 지치는 일이었다. 30년 가까이 나는 기대를 맞추기 위해, 그가 기대를 낮춰주었으면 하는 방향으로 생각했다. 아등바등 기대를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이 부당함을 느끼고 저항하기도 했으니까. 실패하기도 했지만.
엄마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선언했지만 감정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나만큼의 삶을 누리지 못한 이제는 중년의 나이의 여성으로서 느껴지는 연민, 이전 같은 관계를 바라는 그에게 더 이상 해줄 수 없다고 느끼는 미안함, 자식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익숙한 감각에서 온 죄책감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엄마와 연락을 하고 나면 이 모든 게 뒤섞인다. 엄마와의 관계에서도 나는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곤 한다.
아빠와 비슷한 점은 엄마와 마주하는 것이 아직 불안하고 불편하다는 점이다. 또는 엄마가 멈춰주었으면 좋겠다고 계속 바라고 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나를 그대로 둬 달라고 울며 소리칠 때도 엄마는 내 부탁을 들어준 적 없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어떻게 정해진 기한도 없이 그러라는 거니? 내가 힘든데."라고 대답했다.
엄마와 건강한 관계가 되지 못해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엄마의 사랑, 기대, 약한 부분, 악한 부분은 모두 한 몸이다. 엄마의 여러 가지 부분은 서로 단단하게 얽혀 있어서 내가 원하는 부분만 없애거나 선택할 수 없다. 내가 나를 엄마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줄 수 없듯 엄마도 그럴 수 없다. 그러면서도 모순된 마음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엄마와 편안한 관계가 되고 싶다. 엄마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싶다. 나의 삶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선에서 그게 가능했으면 좋겠다. 서로에게 착취하고 착취당하기 쉬운 우리 관계가 더 나아지고 싶다.
내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할 수 있는 첫 단추는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절보다는 더 확실한 방법을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편안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일이다. 편안하다고 느껴지는 일을 하고 불편하다고 느끼면 멈추는 것. 내 역할, 상황, 죄책감, 연민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내가 하고 나면 어떤 마음이 들지, 그래서 내 마음이 편안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서로가 숨을 쉴 수 있는 관계일지 먼저 생각하고 싶다. 늘 상황이 달라지고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천천히 해 보자.
스스로에게는 내가 하는 마음이나 행동을 비난하거나 왜곡하거나 죄책감을 갖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엄마의 가스 라이팅과 자신에게 하는 비하적인 생각에 물들어서 나를 괴롭히고 억압하는 일들이 많았다. 나를 응원하고 따뜻하게 봐주자. 거절하는 선택, 단호하게 나를 지키는 선택에 잘했다고 칭찬해주자. 내가 어렵고 힘든 일을 겪게 돼서 슬퍼할 때는 나를 위로하고 보듬어주자. 나는 지친 나를 끌어안고 위로해 주고 싶다. 어려운 순간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온 나에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나에게 소중하게 대해주자.
나는 그저 한 인간일 뿐이다. 내 인생을 휘두르던 엄마도 한 인간일 뿐이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 사랑스러운 면도, 악하고 이기적인 면도 있다. 그저 나는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일 뿐이다. 엄마도 내게 이상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단 사실을 그대로 바라볼 뿐이다. 세상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삶의 방향도 내가 원하는 대로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이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다음 방향이 궁금하다. 되도록이면 내가 건강하고 행복한 방향을 선택하고 싶고, 그렇게 흘러가지 않더라도 그런 나를 원망하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