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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Dec 18. 2018

28. 바쁜게 지나가면

일상을 유지하기도 벅찬 하루

애인이 야근을 끝내고 와서 종종하는 말이 있다. 또는 정신 없는 하루를 보내고 와서 지친 얼굴로 하기도 한다. 나도 그럴 때가 종종 있다. 달력에 빼곡하게 들어찬 일정표를 바라보며 일정표의 저 끝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 일만 끝나면 할 거야."라고. 하지만 하도 많이 다짐을 하고 지키지 않은 약속이라 그런지 말하면서도 자신감이 없다. 그래도 늘 바쁜게 끝나면 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사실 엄청 거창한 일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운동을 배워본다던지, 맛있다고 소문난 그 음식점에서 메인 메뉴를 주문한다던지, 겨울이 시작 되었는데도 한참이나 못산 장갑을 고른다던지 하는 작고 소소한 일들.


나는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쁠까?

내가 하는 일을 찬찬이 돌아보자. 돌아보다 보면 사실 굵직굵직한 일을 그리 많지 않다. 연말이 되었지만 업무적인 일을 제외하고는 모임이나 개인적인 약속이 매번 있는건 아니다. 나머지는 거의 주말에 몰아 넣는 편이니까. 출장도 종종 가기는 하고 몸도 좀 비실거리는 편이라 체력적으로 뭔가를 여유있고 빡빡하게 잡을 형편은 안 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안 바쁜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내 직장은 요즘 그렇게나 중요한 '칼퇴'를 눈치주지 않고 '워라벨'을 지켜준다는 정시출근, 정시퇴근이 보장된 곳이다. 퇴근 후 일상을 망친다는 회식문화도 거의 없어서 퇴근 후의 내 시간도 거의 보장된 편이다. 그런데도 나는 뭐가 문제일까.




나는 보통 아침 7시 반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아침잠이 많기도 하고 연말이 오니 하루가 다르게 체력이 떨어지는 기분이다. 겨우 일어나 씻고, 출근복을 입고, 얼굴에 좀 찍어 바르다 보면 벌써 8시가 다가온다. 아침거리를 간단히 챙겨들고 출근한다. 아침밥을 차려먹는 옵션따윈 체력이 든든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소분해서 얼려둔 밥을 해동하고 반찬을  꺼내서 아침을 챙겨먹은 뒤 설거지까지 하고 오려면 늦어도 6시 50분에는 일어나야 하는걸. 나는 그 시간을 간편한 아침거리를 고민하면서 해결했다. 그나마 체력에 여유가 조금 있을 때는 전날 소분해놓은 샐러드를 먹지만 요즘같이 힘들 때는 1회분의 샐러드, 시리얼, 두유, 고구마 말랭이 같은 것들로 아침을 대신하곤 한다. 그래도 이런 거라도 챙겨먹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어도 점심에는 직장 구내 식당에서 해결할 수 있고, 이곳 밥이 맛있단 사실에 위안을 하면서.


퇴근하고 약속이 없는날엔 보통 저녁을 사 들고 오거나 먹고 들어오곤 한다. 직장에서 모든걸 불태오고 온 나는 밥까지 차릴 정신적, 육체적 여유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격주로 한번 수요일 저녁에는 언니네 텃밭에서 1인 식재료가 오니까 밥을 해먹곤 한다. 또는 마켓컬리에서 주문한 밀키트나 간편 식재료에 내가 만든 한두가지를 추가해 먹기도 한다. 오는 길에 샌드위치나 김밥을 사 오는 것보다는 든든한 선택이기는 하다. 그래도 밖에서 사 먹는게 가장 마음이 편하다. 식재료를 정기적으로 주문하는 일, 알맞게  재고를 관리하는 일, 준비해서 먹고 치우는 것의 고단함을 모두 지운 채 가서 먹기만 하고 나오면 되는 선택지가 있는데 굳이 집에서 먹는 일을 선택할 이유는 거의 없다. 내가 만든게 좀더 건강한 식재료라는 걸 제외한다면.


식사를 마치고 나면 집에서 할 일도 꽤나 많다. 식사를 해결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정리정돈이다. 어지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고, 먼지를 닦고 집안의 재고를 확인해서 필요한 생필품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래야 필요한 물건이 어디 있는지 그때 그때 찾을 수 있고, 안정적인 분위기에서 쉴 수 있고, 필요한 물품을 필요한 때에 쓸 수 있으니까. 옷과 침구를 관리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세탁 주기나 얼룩을 파악해서 세탁소에 맡기거나, 이불같이 큰 침구류는 나눠 빨거나 빨래방에서 빨아 건조까지 하고 오곤 한다. 수건이나 물빨래 가능한 옷은 분류해서 세탁기로 빨고 마르면 개서 옷장에 넣어 놓는다. 가끔 주말에는 계절에 따라 배치를 다르게 해서 다시 정리하기도 한다. 속옷은 손빨래를 하기도 한다. 집안일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 뒤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면 시간은 거의 9시가 넘어간다. 물론 중간중간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폰도 보고, 꽃의 물을 갈아주면서 느릿느릿 일하긴 한다. 하지만 이정도 시간이 되고나면 하루가 다 갔다는 생각에 아쉬워지곤 한다. 오늘 하루종일 내가 뭘 했나 하는 생각도 들곤 한다.


그래서 자기 전까지 글도 쓰고, 책도 읽고, 노닥노닥 폰을 보며 나만의 시간도 가지고, 애인과 하루 동안 밀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열시 반. 곧 자야할 시간이다. 시간이 너무도 아깝다. 사실 나는 오늘 집에서 요가도 좀 하고 싶었고, 내일 아침 먹을 것도 준비하면 내일 더 건강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고, 오늘 일을 조금 내일로 미뤘으면 학원도 등록했을 것 같다. 하지만 내일은 늦게까지 모임이 있으니까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될 것 같다. 또는 오늘은 상담을 다녀오고 저녁을 먹느라 늦었는데, 내일 빨래를 하지 않으면 쓸 수건이 부족할 거다. 집안일은 매일 하면 조금씩이지만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미루기 시작하면 어느새 쓸 휴지가 없거나 치약이나 샴푸가 떨어지곤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혼자 살면서 뭘 그리 바쁘냐며, 그냥 대충 하고 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집안의 누군가가 돌봄노동을 하고 있거나 일상이 유지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일상을 건강하고 규칙적으로 살고 싶고 그러면서도 그게 내 체력이 허락하는 범위였으면 좋겠다. 혼자 살아오면서 내 건강을 유지하는 범위에서 스스로의 일상과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려면 이에 드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다고 느끼기도 한다. 남들이 말하는 '워라벨'을 비교적 지키기 쉬운 직장인데도 가끔씩은 일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느낀다. 하루 8시간 근무하고, 1시간은 출근과 퇴근을 준비 하고, 3시간 정도는 식사, 집안 관리, 샤워 등을 하고 8시간 수면을 취하고 나면 남는 시간은 겨우 4시간. 남은 네 시간을 가지고 숨돌릴 틈을 가지고, 자기계발도 하고, 몸풀기도 하고, 애인과 하루를 정리하려면 당연히 팍팍할 수밖에. 그리고 그나마 근무시간이 확보된 날엔 괜찮지만 퇴근 시간이 늦어지거나 식사를 직접 차려먹거나 새로운 일이 생길 때면 이런 시간 조차도 줄어들곤 한다.


가끔은 내가 직장에 다니기 위해서 일상을 유지하는 사람인지, 직장의 부속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남들이 말하는 워라벨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나보다 더 오랜 시간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삶을 어떻게 버텨내고 있을까? 나보다 체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자신 외에 책임질 구성원이 있는 사람들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온갖 의문이 내 머릿 속에서 돌아다닌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말할만큼 힘들고 팍팍할 거다. 또는 나보다 에너지가 있거나 의식하지 못하지만 돌봄노동을 해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가지는 의문이 내가 게을러서, 배가 불러서 하는 소리인지 믿기지 않곤 한다.


운동이야 빨래와 청소를 주말 내내 몰아서 한다 치고 시간을 내면 되는 일이다. 소문난 그 음식점은 주말 아침에 모든 집안일을 해치운 뒤 가면 되는 일이다. 장갑도 주말에 시간만 나면 금방 사오거나 틈 나는 시간에 인터넷 쇼핑을 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간단한 일을 나는 매번 "이번에 좀 바쁜게 지나가면" 한다고 핑계를 대고 있는 거다. 이렇게나 여유를 내고, 다른 방법이 있는데 이래선 안 되고 저래선 안 된다며 미루기만 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면 이상하게 나는 금방 지치곤 한다. 그렇게 살아보기도 했다. 주 3회 이상 퇴근 후에 운동을 꾸준히 다녔고, 잠을 줄여서 건강한 아침과 저녁을 먹고 준비하는 일을 했었다. 퇴근 하고 자기계발 모임에 가서 공부도 했고, 필요한 게 있으면 주말마다 잔뜩 장을 보거나 쇼핑을 해서 채우곤 했다. 일상이 꽉 찬 삶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금방 나가떨어졌다. 바쁘다는 말 뒤에는 "조금 지나면 그만두려고."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곤 했다. 참 청개구리 심보다. 하고 싶은 걸 안 할 때는 나중에 한다고 하고, 하고 싶은 걸 할 때는 이제 그만두고 싶다고 한다. 어느 쪽도 내게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게 참 문제다.




퇴근 후에 내가 스스로 꾸릴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있단 거에 만족하며 살기가 참 어렵다. 나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나를 위해 쓰고 싶다. 휴식하는 시간, 나 홀로 탐색하는 시간, 나의 건강을 위한 시간, 소중한 사람과 보내는 시간을 밀린 일 처리 하듯 하고 싶지 않다. 시간을 촘촘하게 계획해야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시간이 흘러 넘치듯 보내고 싶단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내 노동시간과 나를 위한 삶이 조금  더 건강한 방향으로 확보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함께 그 시간을 누리면서 긴박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돌보고 다른 이들을 돌볼 여유가 평일에도 충분히 주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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