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은 항상 나에게 잘 해준다. 물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가 사랑스러워서 그에게 늘 잘 해준다. 하지만 가끔은 그가 주는 호의가 어려울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나에게 많은 것을 해주었을 때가 그렇다. 그럴 때는 고마운 마음이 드는 한편 부담스러운 마음도 크다. ‘어떡하지? 나는 그에게 그만큼 보답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게 나의 염치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조건 없는 사랑이란 어려운 문제였다. 엄마가 갑자기 나에게 과하게 칭찬을 쏟아 붇거나 잘 해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나에게 니가 내 딸이어서 기쁘다고 할 때는 의도가 있을 때가 많았다. 그 의도는 나를 힘들게 했다. 높은 기대치에 잘 맞췄으니 앞으로도 잘 하라는 압박이거나 또 다른 의무감을 부여하기 전 나를 흐물흐물하게 만드려는 의도였으니.
그래서 애인이 나에게 호의를 내가 생각한 양보다 많이 주었을 때,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에게 똑같이 보답하지 못 하거나 더 해주지 않으면 그가 나에게 서운해 할 거야.’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마음을 그에게 전했더니 그는 오히려 나의 이런 마음을 서운하게 생각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서 한 일이야. 네가 즐겁고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내 부모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다. 똑같은 기준으로 판단하려고 하면 내가 힘들어진다. 상담 선생님은 좋은 일은 좋은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했다. 관계에서 내가 해준 만큼 상대방에게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해준 만큼 그대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했다. 완벽한 보답은 불가능하다고. 나도 그 말에는 동의가 됐지만 오랜 습관을 놓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내 마음 속의 부정적인 돌덩이는 내 마음의 70 정도를 채우고 있다고 이야기 했다. 내가 어서 단단해져서 이 돌덩이들을 빨리 멀리 던져 버리고 싶다고. 상담 선생님께서 조언하길 그걸 멀리 보내서 치우는 방법도 있지만 긍정적인 기억으로 점점 내 안을 채워서 나쁜 기억이 살 자리를 점점 밀어내는 것도 방법이라고 하셨다. 내가 행복한 상황에서 행복한 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험이 계속된다면 내 부정적인 경험들이 행복한 경험의 양보다 적어질 거라고 하셨다. 그 조언들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 졌다.부정적인 마음이 70이라면 긍정적인 마음을 700, 7000으로 만들면 되겠구나. 그럼 부정적인 건 나에게 어느새 아주 작은 돌멩이일 뿐이겠구나.
상담 선생님의 조언대로 즐거운 일들을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행복한 일도 행복한 그대로 느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건 좋은 대로 그 순간을 그대로 즐기자. 좋은 일에 부정적인 마음을 얹지 말자. 행복한 일에서 불안의 이유를 찾지 말자. 그리고 상담선생님은 한 가지 조언도 더했다. 즐거운 경험들 중 일회성 경험도 좋지만 내가 즐겁고 잘 할수 있는 일로 장기적으로 행복한 경험을 만드는 것도 좋다고. 나는 그 일을 동화 읽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우연히 아동문학을 몇권 읽게 되었는데 읽고 나면 편안한 기분이 들고 앞으로도 꾸준히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아직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지만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계획을 응원받아서 행복했다.
생각한 건 바로 실천해 보기로 했다. 즐거운 일은 즐거운 대로, 기쁜 일은 기쁜 대로 모두 느끼고 행복해보기로 했다.
이번 주말은 애인과 교외에 있는 카페에 갔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조금 어색함을 가지고 갔던 곳이었는데 다시 와보니 다른 느낌이었다. 우리는 편안하게 손을 잡고 서로를 잘 아는 대화를 한단 사실이 즐거웠다. 애인이 자리를 잘 잡은 덕에 주변 풍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행복했다. 그 덕에 겨울에도 햇빛이 들어오니 따뜻한 느낌이었고 편안하게 앉아있을 수 있었다. 카페에 서점이 있어서 서점 구경도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발견한 게 행운이었다. 이 지역 예술인이 디자인했다는 엽서도 정말 예뻐서 몇 장을 샀다. 나중에 책도 읽고 내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엽서를 써 보내야지.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새 직장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엄마, 엄마가 원하는 조건으로 직장을 얻어서 축하해.” 이런 자연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축하를 한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서점에 가서, 엄마가 최대한 상처를 받을 만한 책을 골라놓고 그 책을 엄마에게 보낼까 말까 고민을 했었다. 그때의 내 악의를 엄마에게 전하지 않은 것도 다행이고, 아직 엄마를 용서하지는 않았지만 엄마를 향해 악의만을 담지 않는 내가 되어 다행이다. 나는 아직도 엄마에게 받은 상처에 울기도 하고 힘들어하지만 엄마를 향한 사랑도 인정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예전처럼 엄마의 전화가 두렵지 않아 다행이다.
저녁에는 나와 애인이 둘다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애인이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했고 그가 오늘 이곳에 오자는 아이디어를 내 주어서 고마웠다. 아직 장거리 운전이 서툰 나를 위해 여기까지 운전해준 것도 고마웠다. 그리고 문득 내가 이 식당에 얽힌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 내서 말할 때 애인이 내 편이 되어 준 것도 고마웠다. 상처는 여전히 상처이지만 응원 받고 위로받은 기억과 함께 잘 포장하여 넣어둘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하루 동안에도 행복하고 즐겁고 고맙고 다행인 일들이 있었다. 앞으로 하루 하루 이런 일들을 발견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이런 감정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 나의 일상을 즐겁고 편안한 일들로 채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