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마음으로
작은 장난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애인의 차에 탔다가 그가 잠시 내린 사이 운전석 쪽 수납공간에 엽서가 꽂혀 있었다. 그것도 의도가 뻔한 적나라한 산타가 그려져 있는. 그가 무슨 일을 할지 빤히 예상이 갔지만 모른척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하게 편지를 준비한 그의 다정함에 나는 신이 났다. “날 위해 준비한거야?”라며 그가 차에 타자마자 호들갑을 떠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눈치챈 걸 알게 된 애인은 자기가 숨긴건 어떻게 알았냐며 얼굴이 한껏 달아올랐다. 서프라이즈로 하려던 다른 일들도 다 들통나버려서 아쉽다면서. 나도 다 들통나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편지는 받고 싶었다. 그래서 제안했다.
우리 서로에게 편지 쓰는 건 어때?
엽서는 두 장이잖아. 하나는 내가 쓰고 하나는 자기가 쓰자. 우리 곧 여행가니까 예쁜 카페에서 서로에게 편지를 써 주는 거야. 나도 자기에게 편지 써주고 싶고, 받아보고도 싶어. 같이 쓰자.”
애인은 생각만 해도 오글거린다는 듯 표정이 묘해졌다. 하지만 흥분해서 세계 최고 아이디어라는 듯 떠들어대는 내 얼굴을 보며 피해갈 수 없는 일이란 것도 깨달은 듯 했다. 서프라이즈가 더 좋았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애인의 허술함을 놀리면서 나는 이번 여행이 무척 기다려졌다.
우리의 여행이 늘 그러했듯, 평화롭고 따뜻한 기분이었다. 여행의 소소한 부분들은 우리에게 두고두고 이야기할 추억이 되어주는 것도 행복하다. 이번에는 아직 초보 운전인 내가 운전을 하게 됐는데, 주차를 잘 못해서 빙글빙글 돌고 돌아 마트 꼭대기 층에 주차한 일(이날 우리 둘다 마트 옥상 주차장을 처음 가봤다!)이 기억에 남는다.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잡고도 동트고 지는 걸 모두 놓친 것도 좋았고, 다음날 산책을 하는데 날씨가 별로여서 전망이 우중충했던 것도 나름 즐거웠다. 그것 말고도 장본 재료로 함께 요리를 준비하고 기분 좋게 취해서 이야기를 나눴던 것도 행복했다. 특히 그가 만들어준 뱅쇼가 좋았다. 과일을 가득 넣어서 상큼하고 달달한 향이 날 때까지 뭉근하게 우러나오는 걸 기다리는 과정도 좋았고, 상상보다 훨씬 맛있어서 그날 저녁식사 내내 즐거워 붕붕 뜬 기분이었던 것도 좋았다. 덕분이 둘이서 와인 한병을 다 비웠고 평소보다 더 여유롭고 다정한 이야기들을 나눴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편지 쓰기로 한 것을 잊지는 않았다. 대화 중간 중간 애인은 편지에 대한 걱정과, "이 타이밍 쯤 주려고 했는데."라며 틈틈이 아쉬워하는 것을 빼놓지도 않았다. 얼마나 거창한 계획을 세웠는진 알수 없게 되었지만, 그럼 뭐 어때. 난 지금도 넘치게 충분한 걸. 사실은 그의 불만은 조금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어디서 편지를 쓰면 분위기가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숙소에서 나와 점심을 먹고 주변 카페를 검색하다가 바다 전망이라는 예쁜 곳을 발견했다. 그래 오늘은 여기가 딱 좋겠어. 그런데 운전대를 잡고 굽이굽이 가서 도착해보니 막상 도착한 카페는 그렇게 내 눈에 차지 않았다. 날이 흐려서 생각보다 바다 전망은 별로였고, 내가 마신 밀크티는 그저 우유에 밀크티 가루를 넣은 맛이 났다. 장소 선정은 왠지 실패한 것 같았지만, 그럼 뭐 어때. 편지와 펜을 받아든 애인은 이미 안절부절 얼굴이 빨개졌는데. 그걸 본 것만으로도 이번 편지 아이디어는 성공한 기분이었다.
짐짓 분위기를 잡고 편지와 펜을 나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더라? 몇달 전 일이 벌써부터 까마득했다. 장난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과 다르게 막상 펜을 들고 한 글자 한 글자 쓰며 글을 이어가다 보니 제법 진지한 글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올 한 해 동안 그에게 느꼈던 감정, 우리가 처음 정말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까지. 생각보다 더 오글거리는 글이 되어가고 있었다.
묵묵히 글을 쓰고 그를 살짝 보니 내가 그 편지를 훔쳐봤다고 생각하는 건지 파드득 놀라는 모습이 귀여워서 껄껄껄 웃었다. 아, 네가 얼마나 귀여운지도 편지에 썼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 생각을 말로 표현한다면 그는 아주 민망해 하겠지? 내 편지를 다시 읽는 척 하면서 그를 살폈다. 빨리 보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그가 편지를 다 쓰자마자 잽싸게 서로 교환을 했다. 그가 뭐라고 썼는지 읽기 시작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글을 쓰던 그가 어떤 사랑의 말로 나를 감동하게 할지 기대하면서.
편지의 내용은 내 예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맞다.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이었지. 첫 문단부터 웃음이 튀어나왔다. 문장마다 물결과 하트 표시가 뿅뿅 돋아있는 그의 글들은 진지함과 거리가 멀었다. 원래도 발랄하고 밝은 성격의 그인데 편지에도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쩜 그는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웃기고 팔랑팔랑 즐거운 편지를 쓸 수 있던 걸까. 하트와 물결이 살랑거리는 편지를 읽고 나니 내 편지를 읽고 있는 그 얼굴을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다. 너는 어떻게 겨울에도 봄같은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나와 너는 이렇게도 달랐구나.
그도 내 편지를 읽더니 다른 온도의 내 편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는 삐뚤한 글자도 마음에 안 들고 두서 없는 내용이었다며 다시 쓰고 싶다고 투덜댔다. 자기가 쓴 편지를 가져가겠다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는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다.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그가 정말 귀여워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흰 종이에 빼곡하게 적은 글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투명하게 보일 수 있는 걸까? 그가 전한 진심이 나의 방법과는 한참이나 달랐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가 새삼 반짝반짝해 보여서 그가 쓴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몇 번이고 다시 웃었다. 내가 편지에 적은 글자 수를 세겠다며 나와 아웅다웅 하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편지를 쓰기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