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도 Jan 18. 2019

30. 조금은 미뤄둬도 괜찮아

모처럼 일찍 잠에서 깨게 되는 그런 날이 있다. 이번에는 하루 내내 긴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고 다시 잠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그런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날따라 잠이 다 달아난 그런 기분이었다. 집을 나서기까지 남는 시간이 넉넉히 생겼다고 생각하니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머리 속으로 오늘 해야할 일들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원래는 집에 돌아와서 저녁때쯤 하게되는 그런 일들이 떠올랐다. 요즘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해서 단어를 외우고 책을 읽어야 했다. 청소도 해야하고 빨래 바구니도 아마 다 찼을 거다. 다 마른 빨래도 건조대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을 테니 한 무더기를 다 걷어내서  곱게 개어둬야 한다. 이걸 다 하려면 저녁시간이 바쁠테니 일찍 일어난 김에 해 두면 저녁에 할 일이 줄어들겠지?


부지런히 할 일을 순서대로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에는 널려 놓은 짐들이 한가득이었다. 세탁소에 맡겨놓아야 할 옷들, 장 보고 아직 정리하지 않은 물건들, 어제 먹다 남은 귤껍데기 같은 것들이었다. 보기 싫은 짐부터 치워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동생이 여행 기념으로 선물해준 향과 차를 발견했다. 나를 생각해준 다정함이 생각나서 즐거워졌다. 그래, 오늘은 이걸 즐기려고 일찍 일어났나보다.




모처럼 미세먼지가 걷힌 맑은 하늘이니 환기부터 하기 시작했다. 나는 겨울만의 느낌을 참 좋아한다. 얼음을 먹으면 차가운 기운이 속까지 퍼져나가는 게 느껴지는 것처럼, 겨울 공기도 그렇다. 베란다 창을 열고 숨을 들이쉬니 차갑고 맑은 공기가 내 몸 속으로 스미는 게 느껴져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베란다 창 쪽은 동향이라 아침 햇빛이 바로 들어오는 것도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옷장과 방문도 모두 열고 보일러는 잠시 꺼 두기로 했다.


기분이 좋아져서 동생이 선물해준 것들도 이참에 맛보고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향을 써본 적이 없어서 대충 유리 병에 꽂아 불을 붙였다. 제사도 지내지 않는 집이라서 향이라면 절에서나 보던 거였는데 나름 운치 있는 기분이 들었다. 향초나 디퓨저와는 다르게 집안에 향 연기가 퍼져가는 것도 나름 마음에 들었다. 재가 많이 떨어져서 치우는 게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그정도 귀찮음은 여유로운 아침 시간엔 다 괜찮은 일이다.


향을 피우며 두유를 한팩 꺼냈다. 냄비에 살살 데우면서 동생에게 선물받은 밀크티 티백을 꺼냈다. 불조절을 잘못해서 두유에 약간 눌은 냄새가 나긴 했지만 차가 부드러워서 마실만 했다. 베란다에서 사과도 꺼내 깎았다. 겨울이라 집안 공기도 금방 서늘해졌다. 문을 닫을까 하다가 러그 안으로 몸을 넣고 사과와 차를 즐겼다. 뜨끈한 엉덩이와 따뜻한 차, 달콤한 과일은 언제나 행복하다.


이렇게 노닥노닥 시간을 보내고 나니 아까 하려던 계획들이 다시 생각났다. 여유를 즐겨 좋긴 했지만 다른 일정들을 잠시 미뤄둔 일이었다. 영어 단어도 외우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개려면 사실 촉박할만큼 시간이 남았다. 아직 세수도 안 하고 화장도 안 했단 생각이 들었다. 러그 안에 들어왔어도 몸은 좀 으슬으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여유, 이런 느낌은 오늘만 느낄 수 있는 일이다. 같은 일을 해도 할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들곤 하는데 오늘은 특별하게 좋은 날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바쁜 일정에 벅차하며 사느라 시간을 촘촘하게 쓰는 일에만 익숙해졌다. 그래서 이렇게 여유가 나는 날에도 내 일정을 미리 해둘 생각이 자꾸 내 엉덩이를 들썩들썩하게 만든다. 지금 이 시간이 마치 내가 허투루 날려먹은 것처럼 조급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사실 조금 허투루 날렸다고 해도 큰 일이 나는 게 아닌데 그런 일이 날 것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곤 한다.


괜찮아. 즐거우면 됐어. 오늘 일찍 일어난 덕에 겨울 공기가 상쾌한 것도 알았잖아. 동생이 선물해준 것도 얼마나 맛있고 즐거운 건지 알게 됐고, 러그 아래서 노닥노닥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잖아. 평화롭운 아침을 여유롭게 맞게 되는 일도 행복하단 걸 알게 되었으면 충분해. 다음에도 저절로 눈이 떠지는 여유로운 아침에 행복한 일들을 찾았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29. 혼자, 또는 함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