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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Jan 30. 2019

31. 내 생애 첫 뮤지컬

넘을 수 없는 서울의 거대한 문화자원에 대해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영화 '마틸다'를 보게 되었는데 소재나 귀여운 아역 배우들이나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었다. 그래서 책을 샀다. 어린이 책이라 금세 읽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빠져들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시대에 아동, 그것도 여자아이에게 그런 특별함을 부여하다니. 새롭고도 즐거워서 단숨에 읽었던 것 같다. 다른 창작물이 없나 이리저리 살펴보던 와중 뮤지컬을 한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후기들을 살펴보니 꽤 괜찮을 듯했다. 하지만 약간의 망설임이 들었다. 물론 비싼 공연비도 공연비지만, 지역이 서울이란 점 때문이었다. 그건 내 시간, 교통비, 체력, 식비 등을 포함한 이야기였다. 늘 이런 식이다. 하지만 표도 얼마 남지 않은 데다 마지막 공연이 다가오고 있어서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눈을 딱 감고 예매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울까지 왕복 7시간 반에 다다르는 거리를 생각하면 눈 앞이 까마득했다. 그래서 애인에게 제안해보기로 했다. 그도 뮤지컬 공연을 서울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며 함께 신이 났다. 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서울까지 가는데 당일치기만 하긴 체력적으로도 마음으로도 아깝고 아쉬웠다. 토요일 세시 공연을 보려고 오전 11시에 출발하면 점심 먹을 생각도 못하고 오후 3시 공연을 볼 테고. 공연이 끝나면 저녁을 아무리 간단히 먹고 내려가도 저녁 10시나 되어야 집에 도착할걸? 내친김에 주말 이틀간 1박 2일 일정을 잡기로 했다. 숙소비까지 합하니 이미 1박 2일 서울기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1박 2일은 행복했다. 서울에는 모든 게 다 있었다. 에그 베네딕트라는 인스타에만 나오는 브런치 카페도 그곳에 있었고, 동남아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도 선택지가 많았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다양한 종류의 수제 맥주집을 가도 되고 가성비 좋은 와인바도 있었다. 쇼핑도 완벽했다. 분명 같은 브랜드인데 서울 지점에는 지방에는 없는 디자인의 상품들도 참 많다. 특히 나와 애인의 주목적이었던 뮤지컬 공연도 완벽했다. 사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뮤지컬과 연극 사이의 공연을 하긴 하는데 무대 효과의 차이가 엄청났다. 학생 때 처음으로 대학로 소극장 공연을 봤을 때의 충격보다 더했다. 고가의 공연비가 아깝지 않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순간순간 내 안의 씁쓸함은 지울 수가 없었다. 어린이 동화를 배경으로 한 공연이라 그런지 어린이 관람객들이 많았는데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공연다운 공연을 본 것은 중학교 때 살던 곳에서 시향 정기 연주회를 봤던 때였다. 매년 정기연주회가 있을 때면 가서 보곤 했다. 내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곳은 그나마 조금 규모가 있는 중소도시여서 큰 공연이 열리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아주 가끔 있는 일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크리스마스나 연말 즈음 또는 유명한 공연단의 전국 순회가 있는 게 아니면 공연 자체를 찾기가 힘들고, 워낙 기회가 적다 보니 유명한 공연은 얻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큰 뮤지컬이 몇 개월에 걸쳐 주말마다 이루어지는 걸 보니 지방과 서울의 격차는 역시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물론 우리 집은 늘 가난해서 나에게 그런 비싼 공연을 보여줄 생각은 못 했겠지만 이렇게 자주 공연하면 한 번쯤은 용돈을 모아 보고 싶은 공연을 보기도 했을 텐데 싶었다. 어릴 때 문화 공간이 가까이에 있고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더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문화 자산을 가진 어른이 되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서울에 가기도 어렵고 그 비용이 부담스러운데 비싼 공연까지 보는 일은 더더욱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라 섣불리 돈을 쓰지 못해서 뮤지컬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도 몰랐다니. 삼십 대가 돼서야 뮤지컬의 세계를 알게 된 게 아쉽기도 하고, 그래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런 공연도 볼 수 있는 기회가 돼서 참 다행이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사실 공연뿐만이 아니다. 공연을 보기 전에는 전시회가 나에게 그런 느낌이었다. 이것도 돈이 없던 미성년 시절의 첫 경험이 시작이었다. 중학생 시절 학교 미술 선생님께서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면서 제자들을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 실제로 미술 작품들을 내 눈으로 보게 됐는데 그 경험이 새로운 충격이었다. 당시 실제로 그린 작품을 보는 일이라곤 불조심 포스터 같은 게 전부였던 내가 실제로 그림을 본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그때부터 지역의 몇 안 되는 전시회장에 새로운 게 나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한 번쯤 보러 가곤 했다. 그때도 유명한 작품들이 오는 건 아주 가끔 있는 일이고 많은 작품이 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대학 시절의 어느 날. 성인이 되었다는 자신감과 서울 지하철 타는 것도 익숙해질 무렵 전시회 소식을 알게 됐다. 예술의 전당은 남부터미널과도 가까웠다. 처음 가서 본 전시회장은 내가 이제껏 가보던 곳과 달랐다. 와 세상엔 이렇게 잘 준비된 전시도 많았구나. 그다음에 기회가 될 때면 동생도 데려갔다. 내가 느낀 그 기분을 동생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는 전시를 보러 서울에 갈 때면 없는 돈을 쪼개서 두세 개씩 보러 가곤 했다. 전시 기간은 비교적 길고 방학도 있어서 여유가 되는 대로 서울에 가곤 했지만 사실 놓치는 게 더 많았다. 보고 싶은 전시가 지리상으로 보기 어려우면 두 곳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때는 숙소비가 넉넉하지 않아서 무조건 당일치기로 끝내곤 했다. 다행히 체력이 되고 시간도 많아서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1시에 돌아오곤 해도 다녀오고 나면 한동안 할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런데 직장인이 되어서 돈이 많아지면 뭐가 좀 나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더욱 문화생활과 멀어진 기분이다. 시간 조율이 좋던 그때와 달리 직장인은 주말이나 연휴가 아니면 시간 내기가 참 어렵다. 게다가 직장 생활에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혹사를 당하다 보니 주말 하루는 집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체력 회복이 가능했다. 연휴가 껴서 1박 2일 일정을 감행하고 나면 그다음 주는 죽었다고 생각해야 하니 엄두가 잘 나지 않는다. 특히 서울 같은 지역은 버스나 기차를 이용한 이동시간도 길지만 가서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이미 누적된 이동시간의 피로가 합쳐져서 거의 녹초 상태다. 그렇게 겨우 큰 맘을 먹고 서울에 가면 비용도 만만치 않다. 친구 집에 신세 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친구의 시간과 일정과 삶을 고려하는 것보다 숙소를 잡는 편이 나에게도 친구에게도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이동시간이 길다 보니 외식도 해야 한다. 서울에 가려면 당연히 큰돈이 든다. 바꿔 말하면 내가 원하는 문화생활을 하려면 서울에 사는 사람들보다 몇 배의 비용이 들게 되는 거다.




지방에도 누릴 수 있는 문화자원이 많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도내에 있는 중심 도시나 광역시 급에 도시에도 그런 좋은 문화 인프라가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말에 당일치기로 좋은 전시나 공연을 보고 싶어 검색하면 도내에는 물론이고 옆 도의 광역시를 싹싹 긁어모아 찾아봐도 좋은 전시나 공연 찾기가 힘들다. 어디 전시나 공연만 그럴까. 서울의 국립 중앙 박문관의 처음 가봤을 때, 내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도시의 1층짜리 박물관이 궁전과 초가집만큼의 차이가 보여 슬퍼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도내 도청소재지쯤의 도시에 가면 무료 공연도 종종 있긴 하다는데 내가 사는 소도시에는 그 무료공연도 한 시간 넘게 운전해 가야만 볼 수 있다. 성인이고 직장인인 내 사정도 이 정도인데 문화에 소외된 어린이와 청소년, 장애인, 노인, 임산부, 저소득층 등 여러 층위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 심할까. 나는 가끔 큰 마음을 먹고 먼 길을 떠나지만 이 길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지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쳐야 하는 걸까. 정든 도시이지만 한편으로는 감옥에 갇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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