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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Jan 22. 2019

아직 남은 이야기가 많아서

가족행사, 명절 거부에 대하여

기억나는 첫 장면은 왜인지 부모님 댁 거실에서 내가 자다 깼을 때였다. 눈을 떴을 때 거실 맞은편에서는 아빠가 잠에 들어 있었다. 패닉이 되어 몸이 굳었다. 순간 아빠가 깼다. 어찌할 바 모르던 나는 자는 척을 했다. 통하지 않았다. 아빠는 왜 내가 여기 있냐면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옷 바람으로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하다 도망쳤다. 하필 정신없던 내가 도망치는 곳은 아파트 계단 통로 위쪽이었다. 맨 위층에서 궁지에 몰린 마음에 소리를 지르려는 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들었다. 온 힘을 다해 "악!"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눈앞이 캄캄했다. 숨이 찼다. 아, 꿈이었구나.


긴장이 풀리기도 전에 잠에 취해 다시 눈을 감았다. 현실인지 꿈인지 인식이 제대로 안 되는 상태로 다시 꿈 속이었다. 이번에는 왜인지 아빠가 내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나는 바짝 긴장해서 조수석에 앉았다. 아빠는 어딘가를 가야 한다며 차에서 내려 나를 놓고 어딘가로 떠났다. 아빠를 보내고 나서 멍하니 서있는데 나는 맨발이었다. 발이 더러웠다. 근처에 공중화장실이 보여서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발을 씻고 있었다. 나도 내 발을 씻고 싶어서 깨끗이 씻어냈는데 신발도 없었다.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다시 발이 더러워진 채로 차로 향하는데 갑자기 아빠 얼굴이 내 앞에 훅 나타났다. "으악!" 하면서 다시 깼다. 두 번째도 그냥 꿈일 뿐이었다.


평소보다 거친 꿈을 꾼 나는 몸이 다 긴장했는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는데도 온 몸이 아팠다. 깨어서도 그때의 기분과 느낌이 떠올라 찝찝하다. 내 스트레스가 그만큼 높았구나 싶었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이유는 나도 알고 있었다. 아빠 생일과 그 이후에 설날까지 있어서였다. 아빠의 생일까지 달력에서 지우며 잊고 있었는데 계속 의식하고 있는 거였다. 내가 많이 힘들구나. 두려웠구나.




전날에도 꿈을 꿨다. 아빠 꿈이었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기분 나쁜 감각만 가득했다. 이 꿈을 꾸게 된 건 엄마의 전화 때문이었다. 이틀 전 엄마는 내게 전화해서 곧 있을 아빠 생일은 어떻게 할 건지 물었다. 그러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엄마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엄마에게 대답했다. "엄마, 엄마의 마음은 엄마의 영역이니 잘 다스려요. 지금은 밖이니까 나중에 이야기해요." 통화를 끝내고 나니 죄책감이 들었다. 엄마의 마음을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다. 엄마와 협상을 해 볼까? 아빠가 사과를 하고 안 그러겠다는 약속을 받으면 나도 한발 물러서 보는 걸로? 여기까지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나는 내 행동을 다시 부모의 의사결정에 따라 흔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죄책감이란 참 이상한 감정이다. 사실 엄마는 내 감정을 그리 생각해주지 않는데도 나는 엄마의 감정을 받아주지 않을 때면 죄책감에 그 상황을 다시 곱씹곤 한다. 아빠와의 관계를 끊게 됐을 때 엄마가 전화 와서 내가 내 이야기를 해줄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는 깊이 알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별로 감당하고 싶지 않다고. 그 말을 듣고 슬펐다. 그때 나는 엄마가 나를 위로해주는 줄 알고 전화를 받았는데, 엄마는 엄마가 불편한 상황을 해결해보고 싶어서 나에게 전화를 건 거였다.


예전에 독립했을 때도 그랬다. 연고도 없는 지역에 혼자 살게 됐을 때 나는 여러 모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직장에서는 신입이었고 집에서는 나 혼자였다. 모든 걸 나 혼자 감당하며 살아야 했는데 엄마는 나에게 생활비를 요구했다. 학생에 취준 생활을 하면서 직장에 입고 갈 마땅한 깔끔한 옷이 없던 나는 몇 벌 아닌 옷을 돌려 입었는데, 그걸 보고 어떤 선배는 '유니폼'이냐며 놀리기도 했다. 그땐 그 말이 큰 상처였다. 게다가 나는 한 달 동안 나와 스무 살이나 차이나는 애 딸린 유부남에게 성희롱을 당해서 직장에 성희롱 신고까지 한 상태였다. 이제 한 달 된 생 신입에게 성희롱 신고 담당자는 "혼자 산다는데 그 사람에게 앙갚음당하려면 어쩌려고."라는 걱정을 가장한 협박까지 들었다. 내 고립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때, 나의 부모는 나에게 어떤 반응이었나.


너 말고도 다 힘들다. 그런 걸로 신고하면 앞으로 직장에서 어떻게 버티려고 하느냐. 그거 소문나면 너만 손해다. 나도 사는 게 힘드니 나에게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그렇게 나를 거부하고 발을 뺐을 때 나는 절망했다. 홀로 나 자신을 감당하기에는 하루하루가 너무 버겁고 죽고 싶었다. 자존감은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친구들도 그 당시 만나던 사람도 다들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사회 초년생인 그들은 함께 분노해줬지만 다들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다른 사람들도 내 부모처럼 나를 거부할까 봐 무서워서 모든 걸 다 털어놓지는 못했다. 내가 지금 엄마에게 내 마음을 다 말하지 못하는 건, 엄마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걸 거부하는 건 이런 맥락과 닿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모에게 어떤 반응이 올까 두려워하고, 그들이 이야기를 꺼내서 도저히 지나치지 못해서 회피하고 고민할 시간에 나는 내 인생을 살자. 부모에게 그들이 잘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하지 말자. 늘 그랬듯이 그들은 내 바람대로 나를 따듯하게 대해주지 않을 거다. 나를 소중하게 대할 사람은 나뿐이고 나는 나의 인생에 집중하자. 그리고 내 의사를 엄마가 나에게 다시 전화하기 전 문자로 전달하자. 지금은 내가 많이 두려우니 엄마와 바로 목소리로 직면하는 건 용기가 안 날 수 있어.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


그래서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빠 생일도 설날도 가지 않겠다. 할머니의 생신, 저번에 집에 갔을 때 아빠의 폭언은 내게 충격이고 두려웠다. 나는 다 컸지만 여전히 그 순간은 공포다. 그리고 이때 침묵하는 주변을 견디는 일도 끔찍하다. 나는 감정이 풀리지 않는다. 엄마를 설득하려는 것도 이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내 감정을 알릴 뿐이니 이 문제로 전화를 받고 싶지는 않다.


이 문자를 보내고 나서 하룻밤 새 악몽으로 두 번이나 소리를 지르며 깼던 거다. 왜 이리 두려웠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단 한 번도 부모의 생일을 건너뛰어 본 적이 없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일곱 살. 생일 선물을 받아본 적도 없던 어린 내가 부모의 생일을 어찌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챙겼는지. 내 생일은 다른 가족의 생일처럼 엄마가 생일상을 차려주곤 했다. 물론 고마운 일이었지만 나는 작은 선물이라도 바랐다. 그랬더니 오히려 선물을 받아야 할 건 이렇게 고생한 본인이라며 자신에게 선물을 달라고 해서 입을 다물었다. 아빠는 중학생 때부터였나. 용돈으로 선물을 대신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인정받고 싶었다. 일곱 살의 어느 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을 꽃다발이었다. 그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서프라이즈를 한다며 어설프게 꾸민 식탁 가운데에 꽃가게에서 산 꽃다발을 올려놓고 얼마나 설렜는지. 그리고 꽃을 발견한 엄마의 표정이 나를 얼마나 슬프게 했는지.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부모가 필요로 하는 선물을 미리 계획했다. 몇 달 전부터 돈을 모으고, 한 달 전부터 필요한 것을 알아본 다음 선물을 고르고 골라 주는 나의 마음은 걱정이 앞서곤 했다. 아빠는 선물을 사 가면 이건 어디가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품평을 하곤 했다. 선물을 사면서도 맞춤형으로 제공하지 못해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게 싫어 언제부턴가는 그냥 돈으로 주곤 한다.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식의 의무를 온전히 수행해야 하는 시간이 죽도록 싫었다. 자신의 생일이나 명절, 어버이날 등으로 '자식 잘 키운 보람'을 얻는 그 행동이 숨이 막혔다. 학생 시절의 내가 받는 용돈에 비해 과한 선물을 해도 듣는 소리는 "너는 항상 어딘가에서 돈이 잘 생기더라.", "우리 집에서는 네가 가장 부자야."라는 말을 듣고는 했다. 어떤 해는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해서 숙소를 잡았는데, 숙소에 도착해서부터 그 싸늘한 표정에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 그래서 그다음 여행에선 무리해서 호텔을 잡았었지.


지난 엄마의 생일은 내가 정한 한도 내에서 하고 최대한 욕을 '덜' 먹고 싶었다. 기준을 엄마가 요구하는 만큼으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기대를 맞추지도 욕을 덜 먹고 싶다는 바람도 내다 버리기로 했다. 어제 문자를 보내고 나서는 후련한 기분이 들었는데, 사실은 이 일이 많이 공포스러웠나 보다. 아무 반응이 없던 엄마의 문자도 신경이 쓰이나 보다. 나는 휘둘리고 싶지 않다. 어떤 순간에도 내 인생을 살고 싶다. 힘들고 아팠던 순간들을 다시 연장하고 싶지 않다. 그동안 아프게 해서 미안해 나야. 참고 견디고 아픈 걸 숨기느라 정말 힘들었지? 그 많은 시간 동안 정말 고생했어. 내가 그렇게 힘들고 아팠다면 안 해도 괜찮아. 그동안 충분히 잘 해왔잖아. 그만큼 하면 충분했어.




나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나보다 남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아도 괜찮아. 무엇을 선택하던지 나에게 가장 기쁜 방향을 해 주자. 그동안의 일로 나를 자책하지 말자. 내가 억지로 해봤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일이 나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았잖아. 잘 알기 때문에 안 할 수 있는 용기도 생긴 거야. 내가 한 선택이 나에게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다른 기쁜 일들을 찾아가면 되는 거니까. 오늘 나에게 힘든 일이 있었으니 나에게 작은 보상을 주자. 나에게 기쁜 것들을 찾아보자.


모처럼 밖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맛있는 점심을 배부르게 먹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이 많은 식당이었는데 내가 앉을자리가 바로 있었던 것도 즐거웠다. 후식으로는 달달한 것을 먹기로 했다. 전에 지인들과 모임을 할 때 갔던 카페에서 아인슈페너를 팔았는데 크림이 진하고 두껍게 얹어줘서 행복했던 게 생각났다. 카페에 가서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아건 오늘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야. 오늘 마음을 바라보느라 애썼으니 맛있는 선물을 받았어. 기분이 많이 나아졌으면 좋겠어. 나에게 잘해줘서 고마워.


 억눌렸던 과거가 폭풍처럼 몰려와서 한참이나 울었지만 괜찮아. 이제 다 말했다고 안심하던 때에도 예상하지 못하게 다시 울컥하는 순간이 있지. 말할 거리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나 봐. 삼십 년 가까이 응어리진 마음이 몇 개월 안에 풀리긴 힘들다는 걸 나도 알아. 그래서 오늘 하나 더 말했고 오늘 하나 덜어낼 수 있었어. 말하고 덜어낼 용기가 있어서 다행이야. 실컷 울고도 다시 웃을 힘이 있어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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