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은 유난히 돈을 많이 쓰는 기분이다. 기록하는 것을 좋아해서 어플과 가계부 두 곳에다 돈을 쓴 내역을 기록해보니 많이 쓰기는 했다. 예산 초과한 항목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마음 속에서 불안감이 스물스물 몰려온다. 은행 어플을 쭉 돌아보며 각 계좌의 잔액을 확인해봤다. 가계부를 보며 저축액, 대출잔액을 보며 내 자산을 가늠해보았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돈은 늘 제자리걸음인지. 나 자신이 한심해지고 자책감이 들었다. 불안감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사실은 오늘만 이런 기분이 든건 아니다.
나는 돈에 대한 공포가 큰 편이다. 한푼 두푼 아등바등 모으면서, 최대한 가성비를 생각하면서 소비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살림을 외주화 하는 일에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해나가는 일에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일에도 돈을 잘 나눠서 쓰고 싶어하는 편이다. 이런 내가 돈에 대한 공포가 남다르다고 하면 참 모순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 공포는 매 순간마다 찾아온다. 돈을 쓰던, 쓰지 않던 관계 없이.
이 마음은 가난에 대한 불안 때문에 생긴 감정이다. 그것도 불시에 찾아오는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상상하곤 한다. 내가 갑자기 사고가 나거나 큰 병에 걸려서 직장을 못 다니게 되면 어떡하지? 갑자기 직장에서 잘리면 나는 어떻게 버틸 수 있지? 재취직하기까지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하지? 갑자기 집주인이 새 집을 구하라고 하면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되지? 내 노후에 돈을 벌기 어려워지면 생계는 어떡하지? 이대로 돈을 벌어서 내 노후까지 감당이 가능할까?
어느 정도는 현실성 있는 이야기일 수 있고,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거다. 게다가 한국은 안전한 복지국가가 아니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나처럼 뒷받침 될 안전한 자원이 없는 사람은 쉽게 빈곤해진다. 나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한평생 열심히 일해도 저임금 노동자의 가정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회는 차갑다. 같은 노력을 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와 중산층 가정의 선택 범위는 다를 수밖에 없고 시간이 지날 수록 더 큰 격차가 만들어진다. 내가 어떤 것을 성취하려면 다른 이들보다 열배 백배는 노력해야 겨우 손에 넣을 수도 또는 못 넣을 수도 있다. 도전을 해서 잃을 것이 많은 쪽은 언제나 덜 가진 쪽이다. 구조적인 문제는 분명 존재한다. 사회는 가진 모든 불합리함을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라고 이야기하니까. 구조적인 변화도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이 불안에 지나치게 몰두해 있다는 거다. 불안은 시도때도 없이 나를 휘두르곤 한다. 카페에서 맛있는 디저트를 사 먹을 때면 ‘이렇게 해서 돈은 언제 모으려고?’라며 자신을 혼내곤 한다. 좋은 공연을 보고 싶어 예매를 할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에 ‘참 팔자도 좋다. 이럴 돈이 있으면 불릴 생각을 해.’라며 나를 비난하곤 한다. 심지어는 좋은 식재료를 구매할 때도 ‘내 수준에 이만한 걸 먹을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으로 나를 괴롭힌다. 카페에서 5천원짜리 디저트를 아껴 투자를 하던, 공연비 5만원을 아껴 저축을 하던, 만원이 넘는 한우대신 돼지 앞다리살을 먹던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정작 내 불안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면서.
불안에 끌려들어가지 말자, 불안에 휩쓸리지 말자고 다짐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내 능력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각을 가지고 있던 게 생각이 났다. 남들보다 배로 노력하지 않으면 나는 뒤떨어질 거고, 한 가지의 실패라도 있으면 돌이킬 수 없이 나빠질 거라고. 그런 식으로 나를 궁지에 몰았던 게 떠올랐다. 그런 상황이 벌어질 때 들게 되는 가장 큰 공포는 기댈 곳이 어디에도 없을 거란 생각이었다.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아무도 나를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홀로 그 지옥에서 버텨야 하겠지. 그럴 때는 부모가 나에게 했던 말들도 떠올랐다. 세상 사람들 니가 잘 안되면 다 떨어져 나갈걸? 그럼 남는건 가족 뿐이야. 그 말을 들으면 더 끔찍했다. 최악의 상황이 되면 나에게 남은건 나에게 정서폭력을 서슴없이 하는 가족뿐인 건 절망적인 일이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초반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영재라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부모의 학대 속에서 공부를 하며 서울 의대 합격증을 받으면 부모와 연을 끊는 방식으로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고. 나는 이 장면이 마음이 아프면서도 공감이 갔다. 나도 그랬으니까. 부모가 바라는 대로 다른 건 다 내다버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졸업해서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겠다고. 그러고나면 내 삶을 살겠다. 아주 독립적으로 살겠다. 내 할일은 끝이다. 그래서 착한 딸로 사느라 그동안의 내 인생은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다.
부모의 기대는 나날이 갱신되어 나는 더 깊숙한 늪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부모가 심어준 학대의 논리에 계속 빠져들어갔다. 나는 조금만 더 노력해야 해. 내 부모가 나에게 해줄 건 없으니까 내가 더 노력해서 나를 책임지고 부모도 책임져야 해. 지금 여기서 잘못되면 다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야. 돈 문제도 마찬가지야. 나 스스로 살아야 하고 이 형편에 부모에게 생활비까지 주고 있잖아. 여기서 더 떨어지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게다가 부모는 날 뭐리고 생각할까?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맞아? 겨우 이정도로 되겠어?
여기까지 깨닫고나니 끔찍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공포는 사실 내 부모의 공포가 아니었을까. 나는 스스로 독립해서 나의 삶을 잘 꾸리고 있는데도 불안한 마음으로 자꾸 날 벌주려고 하고 있었구나. 지금 당장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일 뿐이잖아.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일을 생각하면서 내가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현재를 갉아먹고 있었구나. 미래에 일어날 일은 현재에 대한 벌이 아니야. 내가 노력해도 미래가 탄탄하지 않을 수 있고, 내가 지금의 기쁨을 누리는게 미래에 벌받을 만한 일은 이니야. 미래 때문에 지금을 희생하고 불안해 하고 나에게 벌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
고생했어. 이 모든걸 오랜 시간 동안 감당하느라 지치고 힘들었지? 이런 방법으로 생각해온 건 누구라도 괴롭고 힘들었을 거야.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방향대로 살아도 괜찮아. 잘 살기 위해 지금껏 노력해온 걸로도 충분해. 내게 벌어진 어떤 일들은 대비할 수 있지만 대비할 수 없는 일도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자. 내가 그 모든 위험에 대비하며 살 수는 없어. 나는 모든 변인을 통제할 수 없는 그저 인간일 뿐이니까. 그러니 내가 지금 하는 일의 결과는 내 보상이나 벌이 될 수는 없어. 그저 잘 되길 바라고 하는 일로 하루 하루를 잘 보내는 날도, 변화를 꿈꾸는 날도, 저항을 하는 날도 있을 뿐이야.
나는 이제껏 내가 가진 자원을 잘 배분하려고 노력했어. 대출도 열심히 갚고 있고 있어. 내 건강을 위해서 좋은 음식을 먹고 상담을 하고 이제는 운동도 다시 시작했어. 그 외에도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데 돈을 쓰기도 하고, 축하하고 애도하는데도 잘 써왔다고 생각해. 물론 나에게도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문화를 즐기거나, 여행을 가고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돈을 써 왔지. 내가 내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도움이 됐을 거야. 돈을 허투루 썼다고 깨닫게 되는 날에도 나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자. 나는 실수할 수 있고 쓸모없어 보이는 곳에 돈을 쓰기도 하는 거지.
모든 걸 잘 할수는 없어. 의미없이 하는 일도 있어. 그것 또한 내 모습이니 인정해주자. 나는 누구보다도 내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 할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하자. 나는 나로 지내는 것 만으로도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