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도 Apr 14. 2019

33. 소수자가 소수자에게

‪노키즈존 이슈가 뜨겁다. 찬성과 반대가 아주 극명하게 갈리곤 한다. 나는 그게 찬성과 반대를 나눌 이유인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그렇다. 쭉 지켜보고 있자면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비용을 개인이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에 참담한 기분이 든다.‬ 한국은 사회적 비용으로 지불되어야 할게 온전이 개인의 몫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개인의 몫이 사회가 함께 지불해야 한단 합의도 충분히 되어있지 않다고 느낀다.‬




‪내 부모세대에겐 의무교육이 무료가 아니었다. 육성회비가 존재했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교육의 기회를 종종 박탈당했다.‬ 내 아버지는 형들의 희생으로 고등교육을 마쳤고, 수학여행조차 형수님이 쥐어주신 돈으로 겨우 다녀왔다고 했다. 집에 돈을 부쳐주는 형들이 있어도 가난해서 육성회비를 독촉받을 때면 학교를 몰래 빠졌다고 했다. 부농의 자녀였던 엄마는 치르지 않았던 희생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내 조부모는 쉽게 손가락질당하곤 했다. 감당하지 못할 자식을 낳았다고.‬ 하지만 나 어릴 때까지 흙으로 된 초가집에서 살았던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들이 피임이 뭔지나 알았을까. 몇 년 전 큰어머니께서 “어머니께선 어떻게 자식을 그렇게나 많이 낳았어요. 한둘도 낳으려면 몸이 축나는데요.”라고 하셨다. 그랬더니 허허 웃으시더니, “그땐 그래야 하는 줄 알았지. 별도리가 있나. 생기면 낳아야지.” 깊은 곳에서부터 숨이 턱 막혀왔다.




하지만 나는 그런 희생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태어났다. 내 세대에는 육성회비가 없었으니까. 육성회비를 못 냈다고 교사의 조롱을 받을 일이 없었다. 대신 우리 때에는 급식비가 있었다. 내 기억에 칠판의 한쪽 면에는 늘 급식비를 내지 못한 반 친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친구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들어가는 걸 보면서 나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나는 스쿨뱅킹 안내장이 올 때면 엄마에게 수시로 확인을 했다. 급식비 넣었는지 확인해 달라고 애를 태웠다.


그런 시절에 “급식비 낼 돈도 없냐.”는 말은 언뜻 정당화되기 쉬운 조롱이었다. 부모의 능력으로 애를 키우려면 당연히 지불해야 할 비용인데, 그조차 감당 못하면 어떻게 애 낳고 살 생각을 하냐고. 하지만 내 부모세대를 돌아보면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교육을 포기해야 했던 많은 사람들이 내 세대의 부모가 되었을 테니까. 사회가 각박한 탓을 개인에게 돌리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그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기에는 주어진 삶을 살기에도 매우 벅차다. 많은 것을 걸고 목소리를 내고도 대부분 잊혀 간다. 그보다 더한 것을 잃기도 한다.




지금 세대에 초등학교를 다니는 어린이들은 내 세대의 어린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불안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이 세대의 어린이들에겐 무상급식이란 게 생겼다. 매달 내 보호자가 급식비를 제대로 냈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요즘에는 부모의 경제력을 파악하기 위해 직업을 묻거나 자가 전세 월세를 묻는 학교가 있으면 큰 이슈거리가 될 정도다. 내 세대에서는 당연하게 침묵해야 할 일이 지금 세대들에게는 심각한 차별로 인식되는 일들이 많아졌다. 의식의 변화다.


그러나 지금 세대의 어린이들이 당하는 차별은 조금 더 교묘해졌다. 예를 들어 학교에 보호자 참여 행사가 많아진 점이다. 내 세대에는 없던 교통봉사, 등하교 봉사 등이 각 가정에 의무적으로 배분되는 일이 많다. 교통봉사를 배움터 지킴이란 이름으로 고용하고 있는 학교들도 있지만 어린이들의 모든 등하교 시간을 책임질 정도로 고용하진 않는 초단시간 계약직 근로자들이다. 예산 부족이 그 이유인데, 교육청과 학교는 그 부족한 예산을 학생의 보호자들의 무상 노동으로 채우곤 한다.


하지만 가정 내에서 어린이의 등하교 시간에 무상 노동을 제공해줄 수 있는 환경의 보호자는 몇이나 될까? 직장을 다니는 가정이라면 등하교 시간에 직장 출퇴근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가져야 한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면 등하교 시간에 어린이를 돌볼 수 있는 다른 돌봄 인력이 있어야 한다. 돌봄이 필요한 영유아가 있거나 보호자가 임산부, 노인, 장애, 질환이 있어서도 안 된다. 부탁할 다른 인력이라도 있어야 하니 친인척, 다른 보호자, 아니면 단기 알바라도 써야 한다. 그래야 어린이의 교육에 관심 있는 보호자가 될 수 있다.


요즘의 부모도 쉽게 비난을 당하곤 한다. 자신의 자녀 일인데 관심이 없다거나, 안전을 위해 하는 일인데 하루도 시간 내기 어려운 건 핑계라거나. 안내장을 제때 내지 못해도, 자녀의 학교 행사의 참여하지 못해도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어린이가 당연히 가져야 할 사회적 안전망을 국가가 바라보는 ‘정상가정’의 몫으로 감당해야 하는 게 정당한 일일까. 지금 세대의 부모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고학력을 가지고도 아이를 가지면 경력 단절이 되면서 저임금 계약직 노동자가 된다. 공단이 무너지면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무너지고 장시간 노동을 하고도 그에 걸맞은 임금을 받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보육시설은 턱없이 부족하다. 가정에서 맡길 만한 사적인 관계의 보호자가 있는 경우는 사정이 조금 낫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다. 초등학교도 마찬가지다. 방과 후를 보내도 퇴근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돌봄 교실을 신청한다. 중학년부터는 그나마도 지원받기 어려우니 사교육이 돌봄을 대신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안심알리미 서비스(학교를 등하교했는지 어린이의 위치정보를 보호자에게 알림 문자를 제공하는 서비스) 같은 소극적 지원으로는 부족하다. 더 적극적인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들의 학교 밖 인생도 만만치 않다. 약자는 늘 혐오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더 다양한 양상으로, 나나 내 부모세대엔 겪어보지 않았던 방법으로 다가온다. 그중 하나가 노키즈존이다. 물론 내 부모의 세대도, 내 세대도 어린이가 존중받고 보호받지 못하고 큰 세대다. 우리 세대에도 혐오의 칼날은 고통스럽고 아팠다.


내 부모 세대에서 아동 노동이 학대라는 인식은 크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의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혹독한 근무 환경에서 집안의 보탬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전태일이 분신자살했던 그 시절 노동환경에서 어린 여공들의 삶, 몽실언니에서 식모로 내몰린 어린 여자들의 삶은 특별한 게 아니었다. 내 세대에서는 물리적, 언어적 폭력이 학대라는 인식이 크지 않았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잘못하면 ‘사랑의 매’를 맞았다.


내 세대와 그 윗세대의 고통이 당시에는 크게 공감받지 못했듯이 지금 어린이들이 겪는 고통도 공감의 대상이 되긴 요원해 보인다. 내가 어린이라서 보이는 미숙함이 내 부모세대에선 임금을 적게 줄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내 세대에서는 미숙함으로 처벌을 받는 게 정당화되었다. 지금 세대의 어린이들에게는 거부당하는 게 당연해졌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느껴온 익숙한 모멸감이 방식만 달라졌을 뿐 혐오의 이름으로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다.




지인과 어린이를 데리고 음식점에 갔을 때 당했던 선명한 거부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적이 있다. 입장 자체가 거부됐을 때 선명히 떠오르는 모멸감의 얼굴을 나는 어린 시절 충분히 겪어봤다. 또는 어린이를 데리고 어떤 공간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명백한 거부의 표정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어린이와 그 보호자가 잘못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식당에 어린이와 그 보호자에게 살벌한 경고문을 붙인 곳을 발견했을 땐 내가 그 당사자가 아닌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곳에서 내가 밥을 먹으면 어린이와 보호자는 나 또한 그 경고문에 동의하는 사람으로 보며 위축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 식당을 빠져나왔다.


이런 분위기가 만연해진 지금은 어린이 가족이 업장에 있는 곳이나 아기의자, 어린이 식기가 있는 곳일 때야 안심하곤 한다. 그제야 내가 혐오에 동조하는 소비를 하지 않는 기분이어서. 또는 영유아가 있는 손님이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일정 룸을 비워놓는 곳, 수유실을 갖춘 곳은 아주 드물어서 특별한 공간으로 기억되곤 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린이 손님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비언어적 태도가 시설에 앞서 크게 다가오곤 한다.




소설 <마틸다>의 트런치불 교장처럼 미숙했던 어린 시절이 없었다고 그러니 마음껏 차별하고 거부해도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내 세대에도 폭력의 경험이 없으면 “그래도 부모인데.”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도 있겠지. 또는 급식비로 곤란한 경험이 없었다면 “부모인데 급식비도 못 내주면서 애를 낳았냐.”라고 할 수 있을 거다. 그 안에 숨은 사회적 맥락은 모두 지운 채로 개인만 비난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니까.


우리가 다시 어린이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씩 약자의 경험이 있을 수 있다. 내가 구직자라서, 비정규직이라서, 장애인이라서, 여성이라서, 성소수자라서, 노인이라서, 지방 출신이라서, 부모세대에게 금전적 지원을 받지 못해서. 입장이 달라질 뿐 강자의 논리는 항상 약자의 어려움을 개인의 몫으로 전가해왔다. 어려움을 대항하기 어려운 약자의 몫으로 돌리긴 매우 쉬운 일이니까. 그러나 어떤 순간에서는 비난의 화살이 어디에서 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게 정말 개인이 문제여서 그래야 하는지,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어떤 것이 있는지.



작가의 이전글 32. 함께 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