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이 좀 험하다. 어릴 때 운전하면서 욕을 하는 아빠를 정말 싫어했는데, 어쩜 그런 건 반면교사가 안 됐는지. 내가 욕쟁이가 돼버렸다. 특히 양 같은 차들이 칼치기를 할 때면 그 차는 들리지도 않는데 어찌나 나불나불 대는지. 그래서 내 블랙박스를 돌려볼 때면 소리를 끄곤 한다.
하지만 아무 때나 참을 수 없이 욕을 하는 건 아니다. 나도 인간관계가 있고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의 가면을 쓰고 있으니 사람들 있는 데에서 사회적 언어를 사용한다. 남들 앞에서 언성을 높여본 적도 있던가? 가족들과 싸울 때 내게 폭언을 하며 궁지에 몰면 울며 불며 흥분하며 큰 소리를 낸 적은 있지만 욕설까지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욕까지 가는 심한 상황은 없더라도 나는 참 화가 많다. 불 같은 사람이다. 예전에 어떤 워크숍에서 아이스브레이킹 용으로 나를 캐릭터화 표현하는 걸 해본 적이 있다. 나는 불을 뿜는 공룡을 그리고 나를 “불뿜뿜케라톱스”라고 명명했다. 그걸 카톡 프로필 사진에 올려뒀더니 다들 나와 참 잘 어울린다고 했다. 잘 감추고 살았다고 생각했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지난 몇 주간 나는 화가 나는 일이 많았다. 가장 최근의 일은 업무 협조가 들어왔을 때였다. 자신의 일정이 바뀌니 나보고 다른 일정에 업무를 해달라는 거였는데 나는 사정이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자신은 아무리 무리여도 그런 요청을 거절한 적 없다며 나를 비꼬는 거였다. 내가 자신에게 그런 요청을 강요한 적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저 사람이 미친놈 같았다. 말로는 “아휴 더러워서 해주지 뭐.” 싶어서 상황은 불편하지만 해준다고 답변했다. 상황을 알게 된 동료들에게 그 사람이 이상하다며 위로도 받았지만 며칠이 지나도 화가 났다. 사실 쓰는 지금도 돌이켜 보니 화가 난다.
조금 더 전의 일도 있다. 업무 메일에 궁금한 점이 있어 보충설명 요청을 보낸 적이 있다. 그 담당자는 내 요청에 답변을 제대로 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전화를 하라며 번호를 보냈다. 전화를 했더니 다짜고짜 작년에도 이 업무를 했는데 왜 그것도 모르냐는 거다. 그래서 나는 새 담당자고 이 사항에 인수인계받지 않아 몰라서 질문했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내가 직장에서 사람들과 소통을 제대로 안 한다며 뭐가 궁금하냐는 거다. 순간 욱 했지만 가라앉히고 방금 발언은 불쾌하다고 말했다. 나는 공적인 문서에서 없는 사항을 담당자에게 질의한 거고 그게 지난번 담당자와는 구두로 됐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 했다. 상대방은 당황해하더니 그제야 미안하단다. 사과는 받아냈지만 불쾌한 감정이 가시진 않았다.
누군가는 내게 젊은 여자가 겪는 흔한 일이라고 했다. 나이를 먹으면 겪지 않을 일을 사람 가려가며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일이 년 차 생 신입도 아닌데 언제까지 젊은 여자 소리 듣는 신세여야 하는지 화가 났다. 연차가 쌓였는데도 갈등 상황에서 감정을 죽이지 못하는 내가 잘못된 걸까? 하는 자기 검열의 상황도 종종 찾아왔다. 문제는 요즘 들어 이런 감정이 더 심해졌단 거였다. 화가 안 나는 건 내 성향이 아니지만 그 화가 내 일상을 방해할 정도로 오래가는 건 문제가 있으니까. 나는 내 일상을 그때의 불쾌한 감정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다.
내가 물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스위치가 분명한 사람에 속했다. 전쟁 같은 직장 생활과 평온한 나의 일상을 구분해서 쓰곤 했으니까. 직장에서 힘든 일로 울고 온 날도 퇴근하면 농담 소재거리로 쓰곤 했고, 오늘 뭐가 속상한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나는 날도 많았다. ‘그냥 뭐 대충 잘 지냈지. 잘 못 지냈어도 그걸 퇴근해서까지 신경 써서 뭐하나.’ 싶어서 금방 잊었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이상했다. “어휴 저 미친놈들. 재수 없게 왜 저래.”하고 넘어갈 일을 두고두고 곱씹고 있는 거다. 심지어 정신없이 운동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가상의 미래 갈등 상황을 상상해서 서로 대사까지 붙여가며 싸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싸우고 싶어서 집착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러다 깨달았다. 나 지금 굉장히 억울하구나!
물론 억울할 만했다. 상대방에게 다짜고짜 모욕을 주는 행동을 받았을 땐 누구라도 황당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 거다. 특히 내가 불쾌한 게 맞나 싶어서 주춤해서 더 강하게 항의할 타이밍을 놓쳤을 땐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런 일들이 며칠 동안이나 날 괴롭힐 정도로 힘든 건 문제가 있다. 일단 감정 소모가 심하다. 감정 소모를 하다 보면 내가 일상을 잘 살기 어려워지고 즐거워야 할 일도 즐겁게 느끼기 어려우니까. 그냥 잊고 넘어가려고 해도 불쑥불쑥 생각이 났다. 사소한 억울함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주체가 되지 않았다.
억울함의 근원은 따로 있었다.
엄마와의 문제 때문이었다. 결혼 문제로 엄마와 갈등이 있었고, 몇 주간 엄마와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엄마에게 화가 나 있었다. 결혼 문제에 대해 무례하게 말하고 내게 모멸감을 준 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엄마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사실 내게 그럴 자격도 없잖아. 나 어릴 때 이때도 저때도 나 정말 힘들었는데 방치만 했으면서. 날 보호해야 할 순간에 보호하지도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날 그렇게 아까워하는 거야? 심지어 나는 지금 성인인데 아직도 그런 식으로 나를 깎아내리고 휘두르려는 것도 끔찍해.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나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엄마에 대한 생각을 그토록 오래도록 할 일은 아니었다. 엄마는 그저 평소대로 엄마처럼 행동한 것뿐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내가 엄마의 말에 화를 내며 날뛰니 연락도 안 했다. 그런데 내가 엄마를 의식하고 있었다. 내 마음속 한 구석에는 엄마를 향한 인정 욕구가 있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엄마의 인정을 받기 어렵진 않을까?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엄마가 저런 식으로 느끼면 어떡하지? 내가 결정한 부분에 대해 엄마는 어떻게 반응할까? 만약 엄마가 이러이러하게 말하면 그때는 내가 뭐라고 하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답을 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상상한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란 건 이성적으로는 잘 알면서 멈추기 어려웠다.
잠도 잘 못 잤다. 계속 신경을 쓰고 있으니 한 일도 없는데 몸이 지쳤다. 쉽게 피로해지니 신경도 예민해졌다. 원래 생리를 하려던 날짜보다 일주일이나 미뤄진 데다 그 일주일 동안 생리 전 증후군으로 몸이 너덜너덜해졌다.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생리통도 유난히 심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외부의 자극에 더 예민하고 더 힘들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몸상태였다.
그 와중에 나는 이전보다 내 할 말을 잘하는 인간이 되었다. 상담을 받으며 업그레이드된 부분이었다. 원래는 누가 내게 뭔가를 떠넘기려고 하면 내가 좀 무리를 하더라도 해주려고 하는 편이었다. 안 해주면 내가 무능한 기분이었고, 그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질까 봐 의식해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 나는 늘 이런저런 일로 숨이 차고 바빠서 금방 소진되곤 했다. 백세시대라는데 이렇게 살면 안 그래도 비실비실한 내 몸이 더 못 견딜 것 같았다. 나를 지킬 건 나뿐이란 생각이 들자 거절하는 게 좀 더 수월해졌다. 그러다 보니 위의 상황처럼 화를 내는 사람이 생기고 갈등 상황이 생기곤 했다.
평소엔 괜찮았다. 어떤 요청에 선택을 하는 건 나의 권리고, 내가 수락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상대방의 몫이다. 그걸로 상대방이 화를 낸다면 그건 상대방의 화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다. 그런데 엄마와의 갈등으로 너덜너덜해진 나에게 이런 갈등 상황은 이전보다 나를 더 궁지로 내몰았다. 작은 자극에도 폭발할 것 같은 억울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까지 억울할 일이 아닌데 엉뚱한 방향으로 터져 나왔다.
원인을 알고 보니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엄마를 많이 의식했구나.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구나. 그래서 다른 일에도 지나치게 힘들어했구나. 오랫동안 힘들어하느라 참 많이 고생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했구나. 그래도 다시 깨닫게 되어서 다행이야.
예전의 나는 어렸고 엄마의 보호가 필요한 시기에 받지 못해서 힘들고 어려웠어. 그게 나는 아직도 억울한 마음이 들어. 그때 그 일은 엄마가 잘못했고, 억울한 감정이 들 수 있지. 그때를 견디느라 정말 고생했어. 그래도 지금까지 잘 성장해와서 다행이야. 하지만 지금은 엄마의 보호가 더는 필요하지 않고 엄마의 인정이 없어도 스스로 잘 살 수 있어. 그러니까 엄마를 의식하면서 나를 괴롭히지 않아도 돼.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즐거운 일들을 하자. 내 삶엔 사소하지만 즐거운 일이 많이 있어. 한번 사는 인생인데 남의 바람에 맞춰 살기엔 너무 아깝잖아. 내가 원하는 걸 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은 거절도 하며 살자. 남을 의식하며 고통스러운 걸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배려와 희생은 달라. 에너지가 남으면 배려하고 없는 에너지를 쥐어짜서 희생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행복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