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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Dec 23. 2019

인스타처럼 살고 싶어

이번에는 식기세척기를 사고 싶다. 사실 가전 고를 때부터 사고 싶었지만 이제 더 격렬하게 사고 싶다. 김치 냉장고 첫 할부금 결제가 이제 끝난 참인데, 그래도 사고 싶다. 그런데 자리가 없다. 아예 공간이 없는 건 아닌데 썩 들어맞는 곳이 없어서 못 사니 이상한 일이다. 처음에 이 집에 입주할 때만 해도 공간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하나 막막하던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뭘 몰라서 그랬다.




처음 가전을 살 때, 조금 긴박했다. 내가 살던 원래 집은 짐을 빼줘야 하고, 입주할 새 집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세탁기며 냉장고며 기본 가전은 필수니까 배송이 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빨리 사야 했다. 문제는 무엇을 사야 할지 남편과 협의가 잘 안 되었다는 것이다. 내 기준에 남편은 흰 도화지 같은 상태였다. 안 써본 물건은 무조건 필요가 없다고 우겼다. 빨래는 건조대에 널면 되는 것이고, 설거지는 손으로 씻어야 하는 것이고, 스타일러? 그건 또 뭔데. 결국 매장에서 아웅다웅하다가 스타일러는 사고 건조기와 식기세척기는 못 샀다.


입주한 아파트는 북향이었다. 내가 꼭 정남향이나 못해도 남동, 남서향 집으로 고르라고 했는데 남편이 전망만 보고 덜컥 북향집을 골라왔다. 그래 더블체크를 안 한 내 탓도 있지. 속을 달랬다. 그런데 빨래를 하니까 한여름에도 옷이 안 말랐다. 그 덕에 남편은 건조기를 산다는 내 말에 토를 달지 않는 장점도 있었지. 막상 사놓으니까 매우 만족하는 가전이면서.


그런데 문제는 위치 선정이었다. 아파트 구조 만드는 사람들은 살림에 단 한 번도 손을 대본적 없는 게 분명했다. 세탁실을 이렇게 좁아터지게 만들면 대체 건조기를 어디다 놓으란 말인가. 내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통돌이 세탁기를 산 게 문제였나? 건조기를 위에 올릴 수 없어서? 아파트 입주자 톡방에 들어가 보니 그건 아니었다. 구조를 후지게 지어서 어차피 세탁기 위에 보일러가 있으니 건조기 따윈 들어갈 자리가 없단다.


그다음 고민한 곳은 실외기실이었다. 실외기실 겸 베란다로 쓸만한 협소한 공간인데, 역시 이 아파트 구조 설계한 사람은 이곳에서 사는 사람의 기본적인 요구조차 충족시킬 생각이 없었나 보다. 콘센트가 없었다. 하긴 배수구도 없으니 어차피 밑에 물받이를 넣어야 했다. 결국 건조기는 콘센트가 있는 옷방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처음에 이 집에 들어갈 땐 김치 냉장고를 살 생각이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우리는 집에서 밥을 거의 안 먹는 걸. 주방에는 냉장고 자리와 김치냉장고 자리가 있었는데, 우리는 김치냉장고 자리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가올 미래를 알지 못한 낙관적인 선택이었다.


그럼 이 빈 공간을 어떻게 할까. 홈카페에 대한 로망이 있던 남편이 홈바를 넣자고 했다. 남편이 인스타그램, 오늘의 집, 인테리어 블로그들에서 등장한 홈카페들을 보여주니 내 마음도 술렁술렁거렸다. 검색왕 남편은 우리 집 김치냉장고 자리에 딱 맞는 화이트톤의 진열장까지 찾아왔다. 배송기간이 무려 한 달이 걸렸지만 너무 예뻐.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그곳에 찻잔, 와인잔 진열도 해놓고 화이트톤의 토스트기와 커피포트도 샀다. 사실 커피머신까지 있으면 완벽했는데, 커피를 전혀 안 마시는 남편과 카페인에 민감한 내게 여기까진 돈 낭비였다. 그래도 가끔 검색해본다. 화이트톤의 일리 커피머신. 그래서 문제의 김치냉장고는 그 후 옷방으로 들어가게 됐다.




옷방. 그곳은 혼돈의 공간이다. 우리 부부는 첫 집에 아주 열정적인 편이었다. 전세라서 뭔가를 부수거나 설치하거나 그런 건 무리지만, 온 힘을 다해 그곳을 예쁘게 꾸미기 위해 온 노력을 다했다. 게다가 우리 둘 다 신축 아파트에 들어간 건 처음이었다. 아무도 살았던 흔적이 없는 화이트톤의 깔끔한 공간. 0부터 시작하는 즐거움도 나름 쏠쏠했다. 옷방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입주할 때 붙박이장 옵션을 넣을 수 있었지만, 방 세 개짜리 집에 둘이 살면서 굳이 안방까지 옷장을 넣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안방에 있는 가구는 딱 침대만 넣고 사는 게 내 로망이었다. 그놈의 로망. 그 로망 덕에 옷방이 필요했다.


나는 여기저기 검색을 하다가 옷방에 시스템장을 넣기로 했다. 나중에 이사 갈 때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점이 꽤나 매력적이기도 했고 작은 옷방에 가구들이 가득 차면 갑갑해 보일 것 같았다. 업체에서 3D로 짜준 견적서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대신 서랍장 공간과 건조기 위치를 고려해 칸을 줄였는데, 그게 내 실수였다. 나는 결혼 전에도 옷이 별로 없어서 옷장 하나면 충분한 사람이었는데 남편은 옷 부자였다. 그나마도 내가 남편의 집을 정리할 때 짐이 너무 많다며 한가득 버렸는데도 많았다. 게다가 남편은 짐을 한 번에 가져오지도 않았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슬금슬금 가져오던 옷은 행거에 터질 듯이 걸려있다. 그렇다고 옷방에 짐을 더 늘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옷방엔 스타일러와 건조기는 물론이고 김치냉장고까지 있으니까.


그러나 옷방엔 복병이 하나 더 있다. 이불이다. 혼자 살던 시절엔 이불이 많이 필요 없었다. 아니 나는 작은 집에서 미니멀하게 살았으니까 이불을 놓을 자리가 없었다. 좋은 이불 한 채만 사두고 낡으면 바꾸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큰 집에 두 사람이 사니까 조금 달라졌다. 여름이불, 가을 이불, 이불솜 정도면 사면될 줄 알았는데 집이 넓어지니 손님을 재워도 될 공간이 생겼다. 엄마와 할머니가 열정적으로 사준 손님용 이불도 집에 들였다. 그렇게 이불 부자가 되었는데 넣을 공간이 없었다. 결국 이불가방에 넣어 옷방 한쪽 구석에 쑤셔 넣을 수밖에 없었다. 끔찍했다. 그리고 그 이불은 가끔 놀러 오는 동생이 가장 잘 쓰고 있다. 우리 집 15분 거리에 자취하는 동생이 손님용 이불을 잘 써봤자 얼마나 잘 쓸까.




그래서 요즘엔 수납장이나 수납박스나 수납 바구니나 아무튼 물건을 어디다 갖다 박는 게 아니라 정리된 티를 내보기 위한 아이템들을 찾아보고 있다. 처음 살아본 넓은 집, 둘이 살기 때문에 몰랐던 부분들을 싹 도려내고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단 마음도 솟구친다. 그러다 인스타나 오늘의 집 같은 데서 보이는 정갈하고 깔끔하나 집 풍경을 보면 우리 집의 모습이 조금은 구질구질해 보인다. 저 사람의 집은 항상 저렇게 깔끔하고, 정돈되고, 넘치지 않는 물건들만 존재하는 걸까? 나만 이렇게 갈 곳 없는 물건들을 처박아놓는 찌든 삶을 사는 걸까 하고. 그러다 나 또한 인스타에 올려놓은 우리 집 풍경을 위안 삼곤 한다. 봐봐, 딱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잘라내서 보여주면 우리 집 인테리어도 모던한 카페 같잖아. 늘 이렇게 살 순 없지만 순간순간의 뿌듯함을 안고 살 수도 있는 거지. 하면서.


그래도 이왕이면 인스타처럼 살고 싶었다. 예쁘고 정갈한 아이템 만으로 우리 집을 가득 채우고, 깔끔한 수납 능력으로 물건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삶. 그러면서도 사람 사는 것처럼 따뜻한 분위기가 풍겨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와 역시 집이 최고야.' 하게 되는 그런 집. 그러나 여전히 우리 집엔 왜 거기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배치의 물건들이 가득하고, 우리 부부는 "그게 왜 거기에 있어?"를 외치며 살고 있다.


마치 우리 결혼생활 같다. 이상적인 배치도를 그리며 살고 싶었는데 막상 같이 살고 나니까 예상치 못했던 자잘한 난관과 계속 투쟁하는. 그렇다고 결혼한 걸 무르고 싶을 만큼 치명적인 건 아닌데, 숨기고 싶은 짐덩이 들을 꾸역꾸역 한쪽으로 밀어내면서. 좋은 면만 보여주고 싶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고 그런 너저분함도 함께 살아야 하는 그런 거. 왜 나만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 나만 다르리라고 생각했다기보단 내가 주도해서 만들어낸 이런 생활 곳곳에 이렇게 로맨틱하지 못한 부분이 많을 거란 생각을 못 했다. 노력하면 될 줄 알았는데 노력과는 관계없는 부분이 더 많단 게 조금은 사기당한 기분이다. 그럼 뭘 어쩌리, 이미 상황은 벌어졌는데. 저번에 샀던 수납 바구니나 크기별로 더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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