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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Jan 15. 2020

너 없이 떠나는 여행은

동생과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조금은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여행에는 조금 어색함이 있었다. 내가 기혼이기 때문이었다. 결혼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신혼인데 남편 빼고 여행을 간단 사실이 묘하게 불편했다. 남편은 어차피 여행 갈 만큼의 휴가를 못 낼 상황이기도 했지만 돈을 팡팡 쓰며 놀러 갈 건데 나만 갈 거라고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그래서 가기 직전까지 남편의 표정이나 말투,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정작 남편은 평온했는데도.


내가 스스로 전전긍긍하는 만큼 주변에서도 내 이런 죄책감을 자극하곤 했다. 여행이요? 해외로? 남편이랑 가나 봐요, 좋겠다. 아니라고요? 동생이랑? 남편은 뭐라고 안 해요? 어느새 남편은 이해심 많고 배려있는 사람이 되어있었고, 나는 남편 두고도 여행 잘만 다니는 편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전에 결혼 전에 여행 많이 다니란 소리가 이거였나. 결혼하면 죄책감을 동반하지 않고 배우자 빼고 여행 가기가 어려워서? 하긴 나부터가 움츠러드는데 남들의 시선도 그럴 법 했다.


나의 죄책감은 묘한 방식으로 표현되곤 했는데, 그중 하나가 면세였다. 미리 인터넷 면세를 하면서 내 품목보다 남편의 품목을 더 사고 더 신중하게 골랐다. 기념품을 뭘 사야 하나 미리 검색도 해봤다. 예전에 친구와 해외여행을 다녀올 때, 부모님에 대한 알 수 없는 죄책감 때문에 캐리어 가득 선물을 사 왔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막상 여행을 가서는 그런 죄책감이 덜 들었다. 한겨울에 여름인 나라를 가니 맑고 푸른 하늘과 바다, 여름 냄새, 활력 있는 식물들이 주는 에너지가 엄청났다. 새로운 환경에 푹 빠져있다 보면 금세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동생과 해외를 나와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 붙어 있는 게 오래간만이다 보니 서로의 스타일을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나는 이런 여행을 즐기는데 너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구나. 너의 그런 면이 여행 와서는 이런 장점이 있구나. 우리 둘은 따로 다니는 게 즐거울 수도 있겠구나 하고.


사실 나와 내 동생은 혼자서도 잘 놀고 자주 보던 사이가 아니다. 성격이 다르고 공통 관심사가 많지 않아서 대화가 오가기보단 한쪽이 신나서 말할 때 다른 쪽이 들어주는 때가 많기도 하고. 결국 잘 때와 조식 이후로는 각자의 여유를 즐겼다.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촘촘한 스케줄을 짜기보단 비행기와 숙소만 정해놓고 그때그때 생각나는 일을 한가는 점이었다. 게다가 시골스러운 휴양지는 내게 텅 빈 시간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직장도 다녀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는데, 먼 타국에 와서는 꼭 챙길 건 끼니와 체크아웃 시간뿐이고 청소도 빨래도 다 해주니 더욱 그 시간이 크게 느껴졌다.


휴양지의 시간도 나름 바빴다. 아침 요가 프로그램이 궁금해 가보기도 하고, 맛있는 조식 놓치지 않으려고 일찍 일어나기도 했다. 평소에 못 마시던 커피도 카페인 걱정을 하지 않고 듬뿍 마셨고 로망을 채우고 싶다며 책을 들고 바다에 나가 선베드에 누워 책도 읽었다. 점심과 저녁은 이왕 해외에 나왔으니 새로운 음식점에 가보고 싶었고 예쁜 카페에 가서 여유도 내고 사람 구경도 했다. 저녁에는 평소 안 마셨던 술을 마시고 욕조 청소가 귀찮아하지 않았던 반신욕도 즐겼다. 그렇게 착실하게 게으른 부지런쟁이 노릇을 하느라 뭉친 몸을 풀러 마사지도 틈날 때마다 받으러 다녔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마다 남편을 떠올리곤 했다.


그건 죄책감과는 달랐다. 그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그가 생각났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 문득 우리는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거의 모든 여가시간을 서로와 함께 보냈단 사실이 떠올랐다. 게다가 남편 없이 여행을 온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남편과 아주 독점적인 연애를 해왔다. 내 연애 역사상, 심지어 옆 동 기숙사에 살던 사람과 연애를 하던 cc 시절에도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우리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자마자 연애를 시작했고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서로의 집을 오갔으니까. 그리고 칫솔을 욕실에 들여놓은 것을 시작으로 빨래 바구니에 속옷을 넣을 때쯤엔 우리 둘의 살림을 제대로 합치는 게 더 좋겠다고 합의했다. 그의 시간은 내 것이었고 우리는 함께 다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완벽히 떨어져 메신저와 목소리만으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 건 낯선 일이었다. 그의 흔적이나 손길이 아무것도 닿지 않은 공간에 있단 게 생각보다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남편은 출장이 잦은 직장이라 일주일 중 반은 집에 없는 사람이다. 심지어 내가 여행 온 기간만큼 떨어져 있는 것도 가끔 있는 상황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남편은 집에 없고 이런 상황이 낯설지도 쓸쓸하지도 않은데 여행 와서 그런 기분을 느끼니 당황스러웠다.


만약 함께 여행을 왔다면 바다수영을 하자며 싫다는 내 손을 잡고 춤을 추겠지. 그럼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신이 나서 바다에서 놀고 소금기 때문에 수영복 빨래가 귀찮다며 징징댔을 거다. 그러면 너는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며 아이스크림을 사 와서 신나게 먹고 나 대신 수영복 빨래를 해주겠지. 또는 은근히 한식 입맛인 너를 위해 음식점에 갈 때면 밥이 있는 메뉴를 찾아보았겠지. 쌀이 이나라 말로 뭐였더라 고민하면서. 또는 좋은 사진이 나올  때까지 나를 들들 볶아대며 구도를 잡아댈 때면 그만 좀 하자고 짜증을 내기도 하겠지. 그런데 네가 없으니 그런 모든 상황들이 상상 속에서 지나갔다.




집에 돌아와 남편과 침대에 누워 남편 정수리 냄새를 맡았다. 샴푸 향과 함께 구수한 냄새가 함께 났다. 나는 그걸 닭 모이 냄새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말하면 남편이 머리를 내어주지 않으니 샴푸 냄새만 난다고 늘 거짓말한다. 닭 모이 냄새만 뚝 떼어다 가져갔으면 이렇게 그리운 마음이 덜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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