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도 Aug 11. 2020

비가 오는 날에는

어딜가나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을 골라 약속을 잡아도 일기예보가 맞지 않는 사람, 등산을 가서 산 정상까지 힘들게 올라갔는데 구름이 끼기 시작해 헐레벌떡 내려오는 사람이 바로 나다. 특히 이런 불운은 여행갈 때 절정을 맞이한다. 추석 황금 연휴에 비싼 항공료를 내고 해외까지 갔는데 그중 3일이 비가 오는 바람에 온갖 생고생을 한 적도 있다. 비가 안 오는 계절엔 비 대신 눈이 나를 맞이하기도 한다. 겨울 제주여행 땐, 화창하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출발했는데도 돌아오는 날 갑자기 내린 폭설로 공항에 갇힐 뻔한 적도 있다.


몇 년 전, 만난 지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애인, 지금의 남편과 충동적으로 제주도 여행을 잡았다. 우리 동네에서는 제주도가 서울보다 가깝다는 이야기를 하다 5월 연휴의 제주가 예쁠 거라는 이야기로 발전하더니 연휴때 제주 해안도로를 드라이브 하자는 제안에 그만 덥썩 비행기 표를 예매한 거다. 비행기를 예약하고 난 뒤론 렌트카와  숙소까지 한번에 후루룩 예약하고 나니 문득 내가 너무 충동적이었나 싶어 살짝 후회가 됐다. 우린 만난지 한 달밖에 안 됐고, 여행 전에 헤어지면 내 돈과 연휴가 아까워서 어떡하나 싶어서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모든 게 너무 성급한 결정 같았다. 난 그렇게 거창한 계획을 세울 만큼 그가 특별하지도 않았으니까.


다행히 5월까지 무사히 연애를 이어온 우리는 순탄하게 제주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우리 일정에는 또 비소식이 함께했다. 하필 극성수기 여행에 또 불운이 피해가지 않는단 소리를 들으니  현실부정이 앞섰다. 3박4일 중 이틀이나 비가 온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 외면이 잘 먹힌건지 첫 날과 둘째 날은 정말 환상이었다. 5월의 제주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녹차밭이나 정원의 꽃길은 아무렇게나 찍어도 싱그러웠고, 아침 산책길과 저녁 노을빛에 맞춰 바뀌는 바다는 종일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맑은 하늘과 따뜻한 햇빛 덕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다닐 수 있는 것도 행복했다. 여행 전 계획했던 모든 일정들이 완벽하게 이어지는 것조차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틀째 저녁 때 급격하게 흐려지는 하늘을 보고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구나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고 야외 자쿠지에 거품목욕을 하며 놀기가 무섭게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뒷정리는 하는둥 마는둥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 들어가니 애인과 뽀뽀하나 나눌 틈 없이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잠을 자는 줄도 모르고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간 느낌이었다. 덕분에 꿈 하나 안 꾸고 여행에 지친 몸이 충전되어 온몸이 나른했다. 내가 이렇게 근심걱정 없이 제대로 푹 잔게 얼마만이었더라. 멍하니 그런 생각들을 하고있자니 밖에서 빗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예약했던 펜션은 인적이 드문 언덕 중턱에 있는 독채인데다 근처 건물에는 여행객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아무도 없는 적막한  숲속에 빗소리만 가득한 듯 했다. 어쩐지 빗소리가 가까운 느낌에 침실 밖에 나와보니 테라스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저 틈 사이로 이렇게 잔잔한 빗소리가 흘러들어왔구나.


테라스 정원이 온통 비에 젖은 걸 바라보고 있자니 애인도 내 옆에 가만히 앉았다. 애인은 빗소리를 들으며 깨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아 문을 열고 자길 잘했다며 행복해 했고 나는 그 얼굴을 보는게 참 좋았다. 애인이 남은 여행은 느긋하게 비오는 날을 즐기자고 제안하는 것도  마침 오게 된 비 덕분에 우리 여행이 특별해진 것 같았다. 해안도로를 천천히 달리며 비 오는 날의 드라이브를 즐기다 테라스를 활짝 열어놓은 카페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보는 비는 약간 축축하고 바닷바람이 들어와 짠내가 나긴 해도 그마저 나름의 낭만이 있었다. 내 몸에 빗물이 조금 스며도 어차피 여유 있게 보내기로 한 오후니까 괜찮았다. 조금 젖으면 어때 이따 호텔 욕조에서 거품 목욕 한번 더 하면 되는 걸!


디저트를 양껏 먹고 돌아온 호텔에선 빗물을 씻어내고 보송한 침구에 몸을 맡겼다. 이렇게 일찍 숙소에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행이 꼭 활기차고 신날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은 뒹굴뒹굴 휴식을 즐겨보자 싶었다. 침대에 누워 느긋하게 여행에 오기 전 챙겨온 같은 책 두 권을 펴고 애인과 함께 나란히 누웠다. 서로 책을 읽으며 좋았던 부분을 표시해두고 각자의 행복과 슬픔, 어린시절을 나누는 것도 비가 오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어제의 맑음과 오늘의 흐림을 함께 마주하지 않았더라면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들을 끝없이 나누다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아마 이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가족이 되기까지 더 먼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나는 그 여행에 와서야 너의 빛과 그늘을 사랑하게 되었거든.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창을 조금 열고 그 사이로 들려오는 빗소리를 가만가만 듣곤 한다. 그러고 나면 그때 빗소리를 방해하지 않으려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던 너의 몸짓과 함께 비를 바라보던 너의 눈빛이 내게 따뜻하게 스며드는 느낌이다. 그리고 내가 비를 바라보며 “그때 느낌이 나.”라고 말하면 언제든 그 의미를 알아채고 찻잔을 찾는 너의 다정함도 여전해서 참 좋다. 그 덕에 나는 너와의 여행에서 비가 올때면 오히려 반갑다. 나와 너는 비 오는 여행에서도 결국은 좋은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매거진의 이전글 너 없이 떠나는 여행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