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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Oct 01. 2020

가부장제의 축제, 명절

내 아버지는 8남매 중 셋째 아들이다. 아들만 여섯인 집안이라고 이야기하면 벌써 주변 사람들부터 질린 표정을 하곤 한다. 아마 듣는 사람들 조차 마음 속에 상상하는 무언가가 있는 거겠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라 제사는 안 지낸다는게 이 집안 어른들의 자랑인 모양인데 팔남매에 아들만 여섯이라는 막강한 패가 있어서 명절은 늘 전쟁터였다. 명절 연휴 내내 이 집안 며느리들은 새벽 여섯시마다 일어나 9시에 아침상을 차리는 것으로 노동을 시작한다. 아침상 치우면 다시 12시에 점심상을 차리고 점심상을 물리면 간단한 다과 겸 술상을 차리고 6시에 저녁을 먹으면 다시 술상을 차리는 노동의 연속.

셋째 며느리인 엄마는 큰어머니들보단 작은 일을 배당받곤 했는데, 그중 하나가 전 부치는 일이었다. 나도 조금 머리가 큰 뒤로는 엄마 옆에서 같이 전에 밀가루와 계란물을 묻히는 작업을 함께 했다. 네 시간 내내 허리도 못 펴고 기름냄새로 온몸을 적셔가며 수많은 전을 부쳐내는 일은 꽤 중노동이었다. 명절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그 텁텁한 전 냄새일 정도로. 여성들의 노동집약적인 체제로 굴러가는 아버지네 명절 분위기에서 더 상징적인 일은 아침상이다. 밥상에는 1군, 2군, 3군이 있다. 1군은 조부모님과 이집 남자들 몫이다. 꼴같잖은 장손도 포함이다. 2군은 애들 밥상이다. 첫째인 큰아버지와 막내인 삼촌이 스무살 넘게 차이가 나다 보니 집안앤 늘 어린 아이들이 있어서 아이들 밥상을 따로 차려 엄마들이 수발을 들었다. 이집 남자새끼들은 지 자식 밥도 못 먹인다. 3군은 며느리들이다. 며느리들은 아이들이 먹고난 밥상을 먹는다. 그나마도 이전 한옥집에선 마루에서던 것이 중학생 때 집을 새로 지으면서 집 안에서 먹게 됐다. 발전한 일이다. 그리고 여전히 야만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매년 명절 탈출을 꿈꾼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딸 둘의 장녀였으니 나 없으면 혼자 일할 엄마를 두고 가지 못했다. 그리고 경제적 독립을 일찍 이룬 친척 언니들보다 꽤 늦게 빠져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언니들이 일찍 빠져 나온 덕에 내가 그나마 결심하기가 쉬웠던 게 다행이다. 내가 더이상 명절에 나오지 않았을 때, 친척 어른들이 “그래 너도 그럴 때가 되긴 했지.”라고 했다니까. 그러나 엄마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견뎌가면서. 명절마다 엄마를 빼오지 못한 죄책감이 늘 한켠에 자리잡았지만 굳이 엄마가 그런 방식으로 생존하겠다는걸 말릴만큼 나는 전지전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 엄마도 종갓집 둘째딸이라 그런 방식의 삶 이외엔 상상해보지 못했다는게 안타까울 뿐.

내가 그런 삶을 살고도 결혼을 선택한 건 참 멍청한 일이다. 나는 솔직히 많은 여자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나는 좀 다를 줄 알았다. 그런데 나도 똑같았다. 결혼하고 나서야 엄마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온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유무형의 권력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결혼을 한 여자는 철저히 혼자 내던져진다. 남편도, 내 피붙이도, 심지어 여자친구들도 모두 남편의 편을 드는 것이 기본값이다. 온 세상이 내가 틀렸다고 말한다.

사실 나는 남편과 시가를 꽤나 고심해서 선택했다. 그들은 많은 면에서 내가 살아온 집안의 분위기보다 나은 편이었다. 명절에 며느리의 음식솜씨나 노동력을 요구하지 않고, 제사가 넘어오지 않으며 남편과 비슷한 수준의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가정인지 면밀히 따졌다. 남편의 본가는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가정이었다. 시가의 어른들은 나를 ㅇㅇ씨라고 부르며 존대를 하고 나는 남편에게 요구받는 역할 이상의 것을 요구 받은 적이 없었다. 아마 그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존중과 친절함을 보여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 또한 나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여 행동했다. 결혼 하기 전의 감상이 그러했고 결혼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런 집안의 사람들을 시가로 만났다고 하면 내가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복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내겐 인터넷이나 기혼 여성들 사이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시가의 아들가진 유세로 괴롭힘 당한 전력도 없고, 남편이 남의 편이 되어 시가와의 관계를 방관하거나 악화시키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내게 첫 명절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던 여러 눈빛들이 ‘그럼 그렇지, ㅇㅇ이 성격에 손해보는 짓을 할 리가 없지.’로 바뀌어가는 것을 바라볼 때 나는 한층 더 외로워지곤 한다.

나는 한 번도 그런 것들을 복받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남편이 내 본가에서 받는 기대와 의무보다 더 많은 양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사위인 내 남편에게 처가 복 있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위처럼 구는 나와 다르게 며느리처럼 구는 남편을 보며 사람들이 ‘ㅇㅇ이가 남편을 잘 만났다.’고 한다. 시가는 며느리 괴롭히는 전통적 권위를 휘두르지 않아 좋은 사람들이 되고, 남편은 사위가 하지 않아도 되는 그 모든 일을 하며 칭찬받는 사람이 된다. 애초에 내가 며느리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고 시가가 나에게 베풀어준 은혜 같은 것이다.

이번 명절에는 그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 남편과의 싸움 덕분이었다. 남편은 명절을 보내는 방식의 모든 것을 나의 선택권으로 남겼다. 어느 집안을 언제 방문할 건지, 방문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얼마나 시간을 보내고 누구를 만날 것인지. 그러나 그 모든 선택권은 남편이 허락했기에 나오는 것이고 내가 ‘안 가는 것’은 내게 허락된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그 점을 지적하며 내게 필요한 건 ‘안 가도 되는 것’이고 ‘안 가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남편은 감히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나를 향해 폭언을 퍼부었다. 이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로 남편의 화를 마주했지만 폭언으로 이어진 건 처음었다. 그가 그 화가 아주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조차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아, 너 역시 가부장의 화신이구나.’를 톡톡히 재확인한 사건이랄까.

며칠 간의 전쟁 같은 시기를 보내고 남편은 전략을 바꾸기로 했나보다. 이번엔 평소 안하던 짓을 하며 내게 과하게 잘해주기 시작했다. 아마 나에게 한 폭언에 대한 죄책감도 있을 것이고, 이기려고 해봐야 더 격렬하게 맞서는 나를 회유하려는 작전일 것이다. 그러면서 약간의 눈속임도 걸어 놓았다. 마치 이 모든 선택권이 나에게 있고 내가 명절에 시가에 방문하는 일은 남편이 나에게 저자세로 부탁했기 때문이라는 것처럼. 그럼 마치 나는 복받은 여자처럼 마지못해 남편의 뜻을 따라주고, 가정의 평화를 지키고, 아마 그 대가로 남편에게 더한 것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 명절이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그는 그렇게까지 화를 내고 저렇게까지 바짝 내 눈치를 보아가며 나를 시가 어른들 앞에 데려다 놓는 것일까. 그리고 시가 어른들은 최선을 다해 잘해주는데도 정답게 말 한번 붙이지 않는 뻣뻣한 며느리 얼굴을 늘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왜 남편이 자리를 비우면 내게 중요한 비밀인 양 집안사를 나에게 늘어놓으며 ‘이제 우리 식구이니 알아야한다.’고 말씀하실까. 새로 생긴 내 식구는 남편 뿐인걸. 그리고 성묘는 하고 왔느냐는 질문에 ‘제가 왜요?’를 속으로 품어 안고, 남편을 쳐다보며 ‘네 차례야, 똑바로 대답해.’라는 눈빛을 보내야 할까. 남편은 한 번도 겪을 상상조차 안 하는 그런 일들을 왜 나만 겪어야 해?

그래서 명절에 가지 않으면? 아무도 내 편이 아닌 이 세계에서 남편이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들어주지 않는 매정한 나는 무엇이 될까. 겨우 명절에 서너 시간 얼굴 보며 잘 차려입고 착한 며느리처럼 경청하고 호응하고 웃고 오면 되는 것을. 결혼은 다 양보하며 사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너만 다 가지려고 하니? 그럴 거면 결혼을 왜 했니. 참 멍청하다, 멍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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