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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Jul 15. 2021

인생이 이렇게 뒤집힐 줄 알았더라면

새벽 다섯 시 반, 평소라면 절대 눈뜨지 않을 시간에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누구도 의심 불가능한 선명한 두 줄을 확인하자마자 남편을 깨웠다.

“자기, 일어나 봐. 오늘 병원 가야겠어.”

 전날 임신이 아닐 거라며 내 증상을 의심하던 남편이 눈을 번쩍 떴다. 티비에서 보던 임신은 두줄 확인하면 서로 마구 감동의 눈물을 흘리던데. 아니면 마치 이벤트처럼 짠 하고 보여주던가. 하지만 우리 부부는 둘 다 아니었다. 이제 우리 인생이 전과는 아주 다르겠구나 하고 북이 둥둥둥 울리는 기분이랄까.


물론 아예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올해 임신을 하자고 남편과 합의는 한 상태였지만 무척 바라던 바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가장 큰 이유는 나는 둘이 있는 상태가 만족스러웠다. 임신을 하게 되면 벌어질 일들이 그렇게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타지에 덩그러니 부부 둘이서 살고 있는 상황이니 일정기간 둘 중 하나가 외벌이를 해야 할 거다. 다시 맞벌이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입이 두 개인 것과 세 개인 건 다를게 뻔하다. 게다가 나는 우리 직장에서 기혼 유자녀 여성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간접경험을 했다. 내가 저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러거나 저러거나 현실이 닥쳤으니 산부인과에 확인을 받으러 갔다. 그러면서 생애 최초로 남편을 대동하고 함께 질초음파를 보는 신기한 경험도 하게 되었다. 나는 내 뱃속에 알집이 생겨난 이상한 기분을 느꼈고 남편을  돌아보니 그도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흠.. 여기선 눈물을 흘려야 하나?’ 하는 고민이 잠깐 들었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 건 굳이 하지 말자 싶었다. 그러면서 나는 참 건조한 사람이구나. 그리고 기뻐할 것 같던 남편도 막상 상황이 닥치니 나처럼 복잡해 보이고.


그래서 나는 안정기가 다가오기 전까진 누구에게도 임신 사실을 알리지 말자 싶었다. 유산이 잦은 시기고 티도 안 나는 데다 심장 소리도 못 들었다고 임신 확인증도 안 나왔는데 할 수 있는 일도 없지 않은가. 그냥 조용히 지내다가 이 알집에 알도 자리를 잡으면 그때서야 알려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은 그다음 주가 되면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입덧이 왔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기름진 게 썩 당기지 않고 식욕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기집이 9mm라는데 가슴도 부풀어 젖꼭지가 쑤시고 배도 쑤시고 머리도 아픈 데다 잠까지 설치는 게 말이 되냐 싶은데 입덧이라니. 너무 오버한다 싶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하루 종일 숙취에 뱃멀미가 겹친 느낌으로 온 세상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있는 온갖 냄새가 악취로 느껴졌다. 입맛은 당연히 없었다. 주스와 과일 채소로 연명하는 고난의 삶이 시작된 거였다.


그 정도가 되니 직장에서는 출근하기도 전에 퇴근하고 싶어졌다. 나는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출장도 잦고 짐도 들어야 하는데 입덧을 시작한 초기 임산부에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갑자기 내가 속한 모든 조직에서 나 자신이 거대한 짐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병원에서 아직 임신 확인증을 주지 않아 단축근무 신청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본래 내가 감당하던 근무시간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울렁거리는 속을 참은 채로 하루 종일 버틸 수는 없었다. 결국 업무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내 상태를 알리고 할 수 없는 일은 접어야 했다. 그나마 내가 여초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고 대부분 임신 출산 경험이 있는 여성이라 내 사정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는 게 행운이었다. 물론 출장을 줄였고 근무시간을 조정했을 뿐 감당해야 하는 업무량은 그대로였다. 모자란 일은 집에서 하거나 주말에 감당해야 하는 거였다.


내 몸도, 내 직장에서의 위치도 모두 휘청휘청 거리니 틈만 나면 눈물이 났다. 남은 올해 하반기를 이런 식으로 보낼 게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까지 수많은 동료들이 임신한 모습을 봤는데 아무도 이런 속사정까지 티 내지 않았다. 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임신도 출산도 안 해본 사람들에게 또는 해봤더라도 직장에서 이 거대한 위기를 적나라하게 말할 수는 없는 거였다. 어쩜 모두 그렇게 만삭까지 꿋꿋이 살아남아 제 몫을 지켜냈는지 대단할 따름이었다.


그제야 엄마에게 전화할 마음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 가감 없이 임신 사정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필요했다. 증상이야 병원이나 책을 봐도 됐지만 임신으로 인해서 내 인생 모든 것이 걸리적거리는 혼란에 대해 “어떻게 엄마가 돼서 그런 말을 하느냐.”라고 나를 탓하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우리 모녀 관계가 엉망이었던 과거와는 별개로 엄마도 나만큼이나 여성의 인생에 대해 포장하지 않는 사람이란 믿음이 있었다.


엄마가 내 이야기를 듣고 한 첫마디는 “임신하고 직장 다니는 게 쉽지 않은데.”라는 말이었다. 두 번째는 “계획 임신이 맞니?”라는 질문이었고. 어쩜 참 엄마다운 반응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내가 겪고 있는 절망과 혼란과 불안이 섞인 몇 마디를 압축해서 이야기하고 나서도 엄마는 나를 임산부답지 못하다며 좋은 생각만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모성애가 저절로 생긴다고 믿지 말라.’ 던 사람다웠다. 그저 인생 걱정하는 건 당연하고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지만 책임지고 살뿐이라는 말만 해줬을 뿐이다. 감정에 대한 부정을 당하지 않으니 조금 숨통이 트였다. 내가 줄줄이 늘어놓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생명의 고마움도 모르는 철 모르는 생각’이라는 내 안의 검열들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힘이 조금 생긴 기분이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힘들  알았으면, 임신에 여성의 몫이 이렇게까지 거대할  알았으면 이렇게  충격에 빠지지 않았을  같다. 결혼하고 나서야 기혼자들이 하나둘 내게 이야기해줬던 것처럼, 임신하고 나서야 유경험자들이 그제야 속사정을 조금씩 이야기해주는 경험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나는  준비하고  아는 것처럼 살다가  이렇게 뒤통수를 맞곤 한다. 하긴  알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인류의 종은 조금  빨리 끝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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