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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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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Oct 23. 2022

5. 시간

육아에서 가장 우울한 부분이 뭘까. 체력의 한계,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이 계속 들이닥칠 때의 스트레스, 언제나 부족한 수면, 인간관계의 삭제, 직장에서의 내 경력, 망가진 몸, 통증..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우울감의 가장 큰 부분은 아무래도 시간이다. 내 시간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게 나를 자꾸 좌절하게 한다.


직장을 다닐 때의 나도 그리 시간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직장 일은 물 마실 새도, 화장실 갈 새도 없이 바빴고 점심시간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해 체하는 일은 일상이었다. 그 외에 외부활동도 많았기 때문에 나는 늘 일에 치여 살았고 내 시간 만드는 일이 참 어려웠다.


그러나 육아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아기의 24시간 무급 비서가 되어야 했고 내 동료 비서는 유급을 위해 투잡을 뛰고 있어서 아기 돌봄에 온전히 집중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걸 8개월 동안 휴일도 휴가도 없이 반복하려니 죽을 맛이다.


아기가 잠도 자고 혼자 놀기도 하니 늘 고강도의 일은 아니라고 하면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낮잠 시간에는 언제 깰지 모르고 내가 자리를 비우면 바로 깨버리니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다. 밤잠 시간에는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수면 리듬이 있고 자리를 비워도 깨진 않지만 밀린 집안일과 내 수면시간을 빼고 나면 30분-1시간 정도의 여유 시간만 가질 수 있다. 그것 또한 집을 나갈 수 없고 장시간 노동으로 지쳐있어 활동적인 일을 할 의욕도 체력도 없다.


혼자 노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요즘 아기는 기고 잡고 서는 능력이 생겼다. 집안 곳곳을 기어 다니며 온 바닥을 닦고 다니니 이물질이 없도록 청소에 신경 써야 하고 눈에 띄는 물건은 무조건 입에 가져가니 주변을 잘 치워야 한다. 잡고 서기를 할 때는 아기가 뒤로 넘어갈 때 다치지 않도록 뒤를 지켜줘야 하고 아기 키에 닿는 물건들도 아기 시야에서 모두 치워야 한다.


밥이라도 먹으려면 아기의 칭얼거리는 소리, 어딘가에서 위기상황이 되어 다급하게 나를 찾는 울음소리와 마주해야 한다. 낮잠 시간에 먹을 때는 운이 좋으면 다 먹고 설거지할 때 운이 나쁘면 한 수저 뜨자마자 이르게 잠에서 깬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하던 일을 멈춰야 한다. 아기 잘 때 먹으면 내 휴식이 평소보다 짧아지니 거의 아기가 혼자 잘 놀 때 후다닥 먹는 편이다. 그러면 거의 맛을 못 느끼거나 아기 달래고 오느라 식은 밥을 먹어야 해서 입맛이 뚝 떨어진다. 그래서 아기가 밤잠을 자고 나면 과자를 먹는 게 습관이 됐다. 뭔가 차려먹기는 진이 빠지고 아기 설거지만 하루에 대여섯 번을 하는데 내 설거지까지 하는 게 너무 싫다. 봉투만 딱 까서 먹고 버리면 되는 과자가 얼마나 간편하고 쉬운 즐거움을 주는지.


오늘은 아기가 간식을 먹고 수유를 한 다음 기분이 좋아져 잠시 혼자 놀고 있었다. 나는 그 잠깐의 틈을 타 아기가 먹은 자리를 치우고 간식 묻은 턱받이를 빨고 식기류를 설거지했다. 설거지가 마무리될 무렵 아기의 비명소리에 뒤돌아보니 아기가 장난감 위에 엎어져 있었다. 걸음마 보조기를 잡고 서서 흔들다가 그게 아기 무게를 못 견디고 넘어갔나 보다. 아기를 안아서 달래는데 구수한 냄새가 났다. 그사이 응가를 한 거다. 화장실에 데려가 엉덩이를 씻기고 로션을 발라 다시 기저귀와 바지를 입히고 샤워 핸들과 바닥을 헹구고 설거지를 정리하고 나니 아기가 다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낮잠 잘 시간이 된 거다. 다행히 오늘 낮잠은 배도 부르고 응가도 시원하게 해서인지 금세 잠이 들었다. 이제야 다시 휴식시간이다. 제발 한 시간은 자 주기를. 그동안 나는 잠시 글도 쓰고 sns도 보고 웹툰도 보며 짧은 즐거움을 누리다가 시간이 더 남으면 잠시 눈도 붙여본다.


하지만 하루 중 가장 힘든 시간은 그런 정신없을 때가 아니다. 그땐 오히려 몸이 바쁘니 우울감에 젖어들 새가 없다. 진짜는 오후 4-6시 사이 시간이다. 세 번의 수유와 두 번의 이유식 한 번의 간식. 이렇게 먹이기 바쁜 일이 거의 끝나고 한 번의 수유만 남은 오후는 체력도 좀 달리고 아기의 낮잠도 다 끝났으니 이제 자기 전까지 뭘 하고 놀아주나 막막하다. 그래서 요즘은 그래도 외출을 할만하니 무작정 유아 차에 아기를 태워 산책을 나간다. 다행히 아기는 산책하는 동안 유아 차에서 나가겠다고 칭얼거리진 않는다. 하지만 말 못 하는 아기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아파트 단지를 뱅뱅 도는 나는 정말 적적하고 갑갑하고 미치겠다. 분위기를 전환해보겠다고 다른 아파트 단지를 빙빙 돌아도 지나다니는 차와 유아 차가 다닐 수 없는 턱을 피해 이리저리 다니는 건 이 아파트의 숲에 혼자 던져진 듯한 외로움이 나를 괴롭힌다. 지나가는 아기 보호자들을 볼 때면 붙잡고 묻고 싶은 기분이 든다. “저만 이렇게 혼자 갑갑하게 살고 있나요?” “이 빠져나오기 힘든 터널을 다 어떻게 견디고 살아요?” 하고.


모르겠다. 다들 어떻게 이렇게 나라는 사람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시간을 견디면서 사는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견딘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들 그럭저럭 살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괴로워하며 살고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괴로운 건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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