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옷이응 Aug 26. 2020

유독 내가 오래 머물렀던,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

스물셋에게도 추억은 있다

나는 인생의 반을 '착한 아이'로 살아왔다. 학생의 본분을 잊지 않고 공부를 스스로 열심히 했으며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어른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착한 내가 진짜 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학생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학을 잘 가기 위해서, 즉 나를 위해서였고, 친구와 어른과의 트러블을 만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그들에게 나를 맞추었던 것이었다. 겉과 속이 달랐던 아이,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



진짜 나를 만나게 해준건 처음으로 참가한 2013년의 학교 축제. 나는 그날의 분위기와 무대, 사람들의 눈빛을 아직 잊지 못한다. 같은 무리의 친구들과 얼떨결에 축제 참가 신청서를 넣고 두 달간 열심히 연습했다. 아마 미쓰에이의 Goodbye baby였을 것이다. 몸으로 익힌 것이 무서운 게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 안무들이 무의식적으로 되살아난다. 아무튼 두 달간 춤에는 문외한이던 내가 안무를 익혔고, 동선을 외웠고, 이 기간 동안 나는 뭔지 모를 자신감 혹은 우월감을 가졌다. 당시 소위 예쁘고 인기가 많은 여자아이들이 축제에 참가했기 때문에 내가 그 축에 포함된다는 생각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의미였겠지.



하지만 축제 당일에 나는 얕은 우월감 따위가 아닌 상상하지도 못했고 느껴본 적 없던 신기한 감정들을 느꼈다. 우리 차례가 다가왔고, 사회자의 소개를 끝으로 무대에 올랐다. 노래가 시작되고 무대 조명이 나를 밝혔다. 그 순간 눈을 뜬 나는 내 몸을 열심히 움직이며 춤을 췄고, 관객석 조명이 빠르게 돌아갈 때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보이는 친구들의 까만 눈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눈은 참 신기했다. 마치 내가 벌거벗은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가도 나를 반짝거리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1000명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그들의 시선 끝에 내가 머문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벅찬 일이었다. 그렇게 약 4분간의 노래가 끝나고 나는 깨달았다.



'나도 주목받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이전까지의 나는 착한 아이로 둔갑하여 누군가들의 그림자를 자처했다. 하지만 나의 욕망은 그림자가 아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관심과 주목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 어렸던 나에게도 나름의 엄격한 기준이 있었는데 바로 주목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는 것. 어느 누구도 아닌 내가 내 자신을 그 틀 속에 가뒀다는 사실을 내가 깨달은 순간에는 충격적이었지만 행복했다. 더 이상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는 나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받는 순간이었다.



2013년 축제 이후 나의 중학교 생활은 매일 설렜고 기다려졌고 또 드라마틱한 요소가 가득한 16부작의 10대 학교생활을 그린 드라마 같았다.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마음을 처음으로 표현하고, 확인받았던 순간.

친구들과 일상을 함께하며 모든 순간을 같이 나누던 순간.

학교 선생님에게 일탈을 목격당하고 혼났던 순간.


모든 순간들이 나에겐 처음이었고, 도전이었다.

동시에 나는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고, 졸업 전 날 015B의 '이젠 안녕'을 들으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며 나의 '처음'이 가득했던 중학교 생활을 끝맺었다.



누군가 스물셋의 너에게도 추억이 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스물셋인 지금도 나의 2013년을 여전히 추억하고 되새긴다고 답할 것이다. 엉망이었고 실수투성이었지만 그럼에도 2013년의 나는 솔직해서 빛났으며 처음의 순간들을 아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현명한 여자아이였기에. 그래서 유독 오래 머물렀고,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추억에는 나이가 없다. 과거를 지나쳐오지 않은 이는 없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고작 스물셋이지만 나에게는 떠올리기만 해도 눈부시고 소중한 추억이 존재한다.






2013년을 예쁘게 그려준 그 시절의 나에게 고맙고,

그 시절의 나와 함께해준 그들도 행복하길.


매거진의 이전글 Prologue : 낯설기만 한 스물셋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