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의 유일무이한 카피라이터로 입사한 신입의 꿈..같은 회사생활
2023년 8월, 한 호텔로부터 오퍼레터를 받았다.
직무란에 카피라이터라고 적힌 문서에 망설임 없이 서명을 했고, 그렇게 나는 이곳의 유일무이한 신입 카피라이터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음 한 켠에 소중히 간직해 왔던,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했던가. 불행하게도 이 속담에 나는 해당되지 않았다.
이곳은 곧 대대적인 오픈을 앞두고 있었고, 이를 위해 모인 멤버들은 호텔 세일즈, 브랜드 마케팅, 마이스 오퍼레이팅 등 자신의 분야에서 내가 감히 쳐다보지 못할 경력과 뾰족한 무기를 가진 전문가들이었다.
그중, 신입은 딱 나 하나였다. 4번의 인턴 경험이 유일한 나의 믿을 구석이었건만 그것도 무용지물이었다. 특히 나를 뽑아주신 상무님은 직접 만나 뵈니 그의 기세와 분위기가 상상보다 더 강렬했고, 그와 함께한 첫 캐치업 미팅에서는 정말 말 그대로 '발발' 떨었던 것 같다.
"세영님은 카피라이터로서 '글쓰기'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전문가예요.
그러니 카피라이터로서 당신의 생각을 말하고, 나를 가르치고 설득해야 해요."
신입 1일 차가 듣기에는 너무나도 무겁고 막중한 말을 끝으로 미팅이 마무리되었다. 그 상황을 지금 돌이켜봐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직무의 최대 능력치가 100이라면, 나는 고작 1 정도의 능력을 가진, 그래서 사실상 '전문가'라는 말이 붙기에는 낯섦을 넘어 어불성설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의 생각을 바탕으로 베테랑들을 설득하기에는 내가 가진 경험치와 능력이 너무나도 모자라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백 번 정도 반복되고 결국에는 자학 모드로 넘어가며 마치 야생에 그냥 던져진 것 같은 기분에 입사 첫날, 나는 그렇게 단단히 그리고 잔뜩 쫄아버리고 말았다.
입사 이틀차, 거대한 프로젝트가 떨어졌다.
이름하야 2주 완성 (죽음의) 웹사이트 카피 프로젝트.
전 날 계약서 작성을 위해 만났던 HR팀원 분이 "많이 바쁘실 거 같은데.."라며 말끝을 흐리며 아련하게 나를 쳐다보았던 것이 떠올랐던 것도 잠시, 프로젝트 배경과 기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내 얼굴빛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10월 오픈을 목표로 에이전시와 함께 브랜드 웹사이트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웹사이트 구축 업무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팀이 ‘진행 상황을 잘 공유하지 않는 걸로 유명한 팀’이었다는 것. 실제로 웹사이트의 전반적인 진행 현황은 물론, 가장 기본이 될 페이지 레이아웃조차 공유받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합류했고, 더 이상 타임라인을 미룰 수 없었기에 국문을 포함한 5개 언어의 웹사이트 카피를 2주 안에 완성해 전달해 달라는 미션을 받았다. 말 그대로, 그림도 없는 퍼즐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었다.
해낼 수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그날부터 매일 야근을 하며 글을 써 내려갔다. 입사에 맞춰 이사도 했던 터라, 책상도 없던 시절 새벽에 침대에 앉아 맥주를 까며 키보드를 주구장창 두드려댔다. 내가 일을 하는 와중에 술을 마신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도 같고. 그 혼돈의 시간 속에서 상무님과 정확히 매듭지었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지금은 '잘 해낸다', 그러니까 퀄리티를 챙긴다는 개념보다는 '웹사이트 오픈을 기간 안에 맞춰서 해낸다'가 목표인 상황으로, 최소한의 디렉션을 바탕으로 카피를 작성해 내면 된다. 그리고 그랜드 오프닝이 끝나면, 그때 카피 업데이트를 시작해 보자."
그래, 다시 쓰면 되는 거야. 그 점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사실 2주 간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브랜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시간에 쫓겨 쓰는 글이 의미가 있는 일일까? 브랜드 메시지가 한 톨도 들어가지 못한 글들이 담긴 웹사이트를 오픈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아쉬움을 넘어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서 이상적인 과정을 기대하고 알맞은 정답을 찾을 순 없는 법이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최대의 해답을 찾을 뿐. 게임을 할 때 기본 세팅으로 3개의 목숨을 제공해 주듯, 어찌 되었든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사실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폭풍 같은 2주가 흘렀고, 기간 내 5개 언어를 모두 전달했다. 일본어와 중국어는 읽지도 못하는 내가 번역 에이전시를 쪼아가면서 결국엔 번역본을 다 받아낸 것이다. I'm sorry, I apologize in advance... 이 말을 얼마나 많이 썼는지 아직도 키보드에 즐겨 찾는 문구로 저장이 되어있다. 커다란 일을 끝냈다는 생각이 무색하게, 본격적으로 오프닝을 위한 다양한 카피 제작 요청이 들어왔다. 호텔에 비치되는 사이니지, 안내문, 리플렛, 감사 카드, 키오스크 시스템과 카지노, 아레나, 워터파크 등 각 시설에 필요한 무수히 많은 문구들. 그러니까 호텔에 들어섰을 때 보이는 모든 텍스트를 기획하고 작성한다는 건, 생각보다도 더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나, 할 수 있을까?
6개월 정도가 지났을까. 글 쓰는 기계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잠길 무렵, 우리 호텔은 무사히 오픈을 했고 드디어 나에게도 휴식이 오려나 했던 순간. 상무님이 말씀하셨다. "자, 이제 카피 업데이트 해볼까?"
그의 말이 얄밉다가도 또 반가웠다. '드디어 내가 부끄럽지 않을 만한 글을 기획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설레기도 했다. 약간 들뜬 마음으로 업데이트 타임라인을 짜고, 각 시설 페이지 별로 카피를 업데이트해서 컨펌을 받는 과정을 진행했다. 그런데, 그에게 보내는 족족 리젝을 당했다.
"이게 최선이에요? 실망인데..."
"전문가가 쓴 글로 보이지 않아요."
"내가 수정한 글을 보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인지하고 다시 작성해서 주세요."
훅 들어온 그의 태클에 속수무책으로 넘어졌고 다쳤다. 점점 화가 났다.
브랜드의 방향성에 대해서 나에게 알려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원하는 톤앤매너와 구성을 말해줘야 반영을 하지.
매니저님이랑 상무님이랑 방향성에 대해 얼라인이 안된 것 같은데 내가 왜 고통을 받아야 하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계속되는 불협화음 속 말은 못 하고 답답함과 화만 쌓여가는 도중, 한 달을 내리 쓴소리만 듣던 나는 결심했다.
내가 설득하자.
결심보다는 반항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나는 주로 '곰'같다는 평을 많이 들었는데, 묵묵하고 느릿한 이미지로 여겨지는 곰은 사실 알고 보면 민첩한 대형 맹수다. 평소엔 무던해 보이는 나지만, 자꾸만 쿡쿡 찔러대면 콱 물어버릴 줄도 아는 사람이랄까. 화르륵 불타오른 나는 아닌 밤 중에 노트북을 켜서 문서를 작성했다.
제목은 브랜드 라이팅 가이드.
쉽게 말해 우리 브랜드는 어떤 브랜드인지 정의하고, 그렇기에 어떤 톤앤매너를 갖추고 어떤 원칙이 적용된 텍스트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점검해야 할 체크리스트는 무엇인지에 대해 정리한 것이다.
내가 피드백에 대해서 가졌던 불만은 결국 그래서 어떤 액션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피드백이 없었다는 것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실 '그 액션'이란 것은 내가 제안해야 했던 것이었다.
윗사람이 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만 할 것이었으면 애초에 이 조직에 '나란 사람'이 필요한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단계까지 생각이 흐르니, 입사 첫날 상무님의 말이 떠올랐다. 나를 가르치고 설득하세요.
다음 날, 빼곡히 정리한 문서를 매니저님과 상무님께 전달했다.
제가 생각한 브랜드는 이렇고, 그래서 이런 것들을 담은 카피를 작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가이드라인에 맞게 브랜드 카피를 기획하고자 합니다.
혹시 방향성에 대해 제가 잘못 이해했다거나 덧붙이실 코멘트가 있다면 언제든 말씀 부탁드립니다.
30분 뒤, 답장이 도착했다.
"잘했어요. 이렇게 계속 저에게 제안하고 챌린지를 걸어주세요.
세영님이 정리하신 가이드라인에 동의하고, 앞으로는 이걸 기반으로 모든 카피를 얼라인하도록 해요.
고생했고 고맙습니다."
한 달 만에 받은 칭찬이라,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기뻤다가도 부끄러워졌다. 브랜드의 목소리를 담당하는 카피라이터가 6개월 동안 한 번도 이 브랜드가 어떤 브랜드고,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정리하고 다듬어보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직무유기와 다름없는 것이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여전히 쫄아서 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나에게 너도 말 좀 해보라고, 너도 너의 일을 하라고, 그렇게 나를 쿡쿡 찌르셨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언제나 1인분은 하자.라고 되뇌었던 내가 나의 몫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떠넘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굴이 화끈거리게 부끄러워졌다.
나에게 일이란 영어회화와 같다. 모든 언어는 직접 말하고 내뱉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늘지 않는 것처럼, 일을 할 때도 내 생각과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내뱉을 줄 알아야 한다. 틀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나를 언제나 괴롭히지만, 결국 생각을 내뱉는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의견이 오가면서 일이 잘 진행될 수 있는 밑거름을 만들 수 있고, 내가 책임을 지는 온전한 나의 일이 될 수 있다. 상사의 생각과 마음을 단 번에 맞추는 것이야말로 정답이라고, 일을 잘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 일을 할 때 필요한 건 독심술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조직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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