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상수 Jun 14. 2021

신라 왕릉 탐방기 1

#서남산 박씨 왕릉 탐방

신라 천 년의 고도 경주에는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왕조에 걸맞은 많은 왕릉들이 산재해 있다. 왕릉의 진위 여부를 떠나 한 도시의 영역 안에 이렇게 많은 고분들이 천 년의 세월을 안으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화적인 가치는 가늠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현재 밝혀진 대부분의 신라 왕릉들은 주로 남산 주변에 몰려 있다. 서남산 방면으로는 오릉을 필두로 주로 박씨 왕릉들이 많고 동남산 근방에는 김씨 왕릉들이 대부분이다. 그 외에 남산에서 좀 떨어진 내남에도 다수 분포하고 현곡과 안강, 감포에도 각각 한 기씩 있으며 멀리 경기도 연천에도 한 기가 있다.


먼저 서남산 주변의 왕릉 탐방은 오릉에서 시작된다. 오릉은 신라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시조 박혁거세왕과 그의 부인 알영 왕후,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이 묻혀 있다고 한다. 나정의 전설에 따르면 오릉의 주인인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난 신라 건국의 시조로 서라벌이라는 국명을 짓고 알영정에서 태어난 알영을 왕비로 삼아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이 지난 서기 4년에 서거하여 담음사에서 장례를 지냈다고 전한다.

2대 남해왕은 박혁거세 거서간의 적자로 차차웅이라는 칭호로 불려졌으며 석탈해를 맏사위로 받아들이고 즉위 21년만에 서거하여 사릉원에서 장사 지냈으며, 3대 유리왕은 2대 남해 차차웅의 태자로 이사금의 칭호로 왕위에 올랐으나 석탈해와 더불어 초기 신라를 함께 다스리다가 사후에도 4대 탈해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유리 이사금은 두 부인에게서 각각 일성과 파사를 얻었고 그중 파사는 4대 탈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일성도 후에 7대 왕이 된다. 적자인 일성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5대 파사 이사금은 32년 간의 재위 기간 동안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신라를 진한의 맹주급으로 끌어올린 업적을 남겼다. 오릉은 원형 봉토분으로 가장 남쪽에 있는 1호분이 가장 크고 동쪽에 있는 5호분이 가장 규모가 작다. 

경주 오릉의 전면과 후면

오릉을 둘러본 후 발길을 돌려 가까이 있는 7대 일성왕릉으로 갔다. 오릉에서 일성왕릉 가는 길에는 나정과 남간사지 유적들이 있고 가까운 곳에는 조선 중기의 무신인 김호 장군의 고택도 있다. 동생인 파사가 5대 왕에 오르고 파사왕의 아들인 6대 지마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3대 유리왕의 맏아들 일성 이사금은 21년간 왕위에 있다가 서거하니 그의 뒤를 이은 8대 아달라 이사금은 일성왕의 아들로 신라 초기 마지막 박씨 왕이 된다. 왕릉의 모습은 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돌려 보호석이나 봉토의 흙이 흘러 내리지 않도록 하였다. 

나정에서 멀지 않은 일성왕릉을 탐방한 후 포석정 바로 옆에 있는 6대 지마왕릉으로 향했다. 파사왕의 적자인 지마 이사금은 22년 간의 재위 기간 동안 가야 정벌을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말갈의 침입에 백제와 함께 대적함으로써 일성 이사금 재위까지 백제와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경사진 지형의 높은 쪽에 조성한 지마왕릉은 원형 봉토분으로 아무런 표식이 없는 단순한 형태의 단독분이다.

일성왕릉과 지마왕릉

다음으로는 서남산 유적의 중심지로 탐방객들의 발길이 잦은 삼릉으로 향했다. 경주 배동에 위치한 삼릉은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무덤으로 모두 박씨 성의 왕들이다. 아달라 이사금은 7대 일성왕의 아들로 6대 지마왕의 딸인 내례부인을 왕비로 맞았다. 아달라왕이 죽자 석탈해의 아들 각간 구추와 내례부인 김씨 사이에서 낳은 벌휴 이사금이 9대 왕으로 이어받게 되어 그후 석씨 왕이 172년간 지속된다. 

53대 신덕왕은 8대 아달라왕의 후손인 박예겸의 아들로 타락한 효공왕이 박씨 세력에 의해 제거되자 왕위에 올랐으나 태봉의 궁예와 후백제의 견훤의 잦은 공격에 신라 권역의 대부분을 빼앗겨 겨우 경주 지역을 다스릴 뿐이었다. 신덕왕이 5년 간의 재위 끝에 서거하자 태자로서 왕위에 오른 54대 경명왕은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고려의 도움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7년 간 재위한 후 서거하고 그의 동생인 경애왕이 55대 왕에 오른다. 삼릉은 모두 원형 봉토분으로 몇 차례 도굴을 당하였으며 내부는 횡혈식 석실묘로 돌방 벽면에 병풍 모양으로 벽면에 색이 칠해져 있어 신라 왕릉으로서는 보기 드문 형태라 할 수 있다.

경주 배동 삼릉의 전면과 후면

삼릉 바로 옆에는 신라말 비운의 왕인 55대 경애왕릉이 있다. 경명왕이 후사 없이 서거하자 왕의 동생으로 왕위에 올라 경명왕에 이어 친고려 정책을 펴며 후백제와는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후백제 견훤이 지금의 상주를 거쳐 경주까지 쳐들어옴에 고려의 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나라의 안녕을 빌던 포석정까지 들이닥친 견훤에 의해 경애왕은 자결하고 왕의 외종제 김부가 허수아비 왕인 신라 마지막 56대 경순왕이 된다. 경애왕릉은 서남산 삼릉 계곡 입구의 솔숲 안에 있으며 일반 민묘와 같은 원형 봉토분으로 별다른 특징이 없으며 발굴된 적이 없다고 한다.

경주 서남산의 포석정과 경애왕릉

건국의 시조인 박혁거세 거서간이 묻힌 오릉에서부터 경주 서남산에 주로 자리잡은 박씨 왕들의 왕릉을 탐방하면서 신라 천 년 사직의 흥망성쇠가 한 순간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나정에서 태어나 건국의 초석을 마련한 시조에서부터 포석정의 비극으로 사직의 종말을 앞당긴 경애왕까지 이어진 신라 천 년의 유구한 역사는 남아 있는 왕릉과 함께 오늘도 성스러운 남산의 기운 속에 피어 오른다. 

[Jun 7. 2021]


작가의 이전글 경주 남산 탐방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